Page 12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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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퇴하였다. 이후 구(舊)현도군 지역을 요서 낙                   흐르는 태자하를 건넜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

            랑군에 편입하면서 요동 낙랑군이 생기게 되었                     이 출발했던 졸본 남쪽에는 말갈이 있었는데,
            다.                                           말갈은 추모왕 시기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한사군의 변천과 이동                                 『동명기(東明記)』에 이르기를, “졸본성(卒本城)은 땅

              한사군 설치(BCE 107년)→임둔·진번군을 폐지하                이 말갈에 연접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여 낙랑·현도군에 통합(BCE 82)→현도군을 고구                -『삼국유사』「기이」

              려 서북쪽으로 옮김(BCE 75)→구(舊)현도군 지역
              이 낙랑군에 통합됨→후한 광무제가 ‘살수 이남                   졸본 남쪽으로 ‘말갈→패수→낙랑’이 차례로

              의 낙랑’을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음(CE 44)                 있던 것이다. 이때의 ‘낙랑’은 고구려 대무신왕
                                                         이 항복을 받은 고구려 남쪽 ‘낙랑국’, 또는 후

                                                         한 광무제가 점령하는 ‘살수 이남의 낙랑’으로
              요서와 요동 양쪽 지역에 졸본부여·고구려와                    파악된다.

            낙랑군과의 경계가 생기면서 ‘패수’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지게 되었다. 요서 지역에는                      [대무신왕 15년(32)]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
            난하처럼 동남으로 흐르는 패수가 있고, 요동                      이 옥저(沃沮)에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

            지역은 태자하처럼 서쪽으로 흐르는 패수에 대                      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물어 말하기를,

            한 기록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대의 낯빛을 보니 예사 사람이 아니오. 어찌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요사』「지리지」에는 요양에서 서쪽으로 흐

            르는 태자하가 고구려 시대에 패수로 불렸음
            을 보여주는 기록이 전해진다.




              요양현(遼陽縣), 본래 발해의 금덕현(金德縣)이다.
              한나라 때 패수현(浿水縣)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

              현(句麗縣)으로 고쳤다.-『요사』「지리지」



              졸본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 세력은 고구
            려와 낙랑의 경계였던 ‘패수’, 지금의 요양에                    낙랑군과의 경계가 된 패수에 대한 두 가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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