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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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졸본의 남쪽 춘)으로 천도하는데, 유리왕 21년(2)에 국내성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의 위치를 주류학 으로 다시 옮겼다. 졸본과 눌견, 국내성이 서로
계에서는 오녀산성이 있는 환인으로 보고 있지 멀지 않은 것이다.(졸본→ 눌견(상춘)→ 국내성)
만, 낙랑군 재평양설에 기반한 것으로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임찬경, 복기대 교수 위례성을 떠나 하남 위례성으로
는 의무려산이 있는 금주(錦州)로 파악하지만, 기원전 5년, 위례성에 백제의 첫 나라 ‘십제
여러 정황상 국내성이 위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十濟)’를 세운 소서노 어라하를 잃은 온조왕은
철령·개원 인근으로 추정된다. 미추홀 세력과 함께 바다를 건너 마한 땅으로
이것은 『환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나라를 옮겼다. ‘百家濟海(백가가 바다를 건넜다)’
와도 상통한다. 「고구려국본기」에 따르면 고주 와 ‘百姓樂從(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을 연상시키
몽 성제는 평락 11년(BCE 27) 졸본에서 눌견(상 는 당시 장면을 생각하면 순탄치 않은 미래에
졸본·국내성·위례
성 추정지(진북으
로 보면 위례성은
졸본의 남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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