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대한사랑 11월호
P. 94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광개토대왕릉비와 비슷하다. 발견

            당시부터 비문이 심하게 닳아 앞면과 좌우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다. 1979년 4월 단국대 학술조사단이 고려태
            왕이라는 글자를 판독하면서 고구려비임을 확인했다. 또

            한 전부대사자, 제위, 사자 등 고구려 관직과 광개토대왕

            릉비에서와 같이 고모루성 등의 글자가 보이고 매금, 신
            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이

            를 확증하고 있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건립연대는 449

            년(장수왕 37)에 세웠다는 설과 495년(문자명왕 4)에 세웠다

            는 설 등이 있고, 비의 성격도 고구려의 중원 진출을 기
            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문자명왕의 중원지역 순행을

            기념하기 위한 비라는 설 등이 제기되어 있다.



            충주고구려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천하관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충주 고구려비에서는 신라의 영토를 ‘토내’라고 표현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국토’로 표
              현해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당주’는 고구려의 관직명으로 고구려군 사령관을 지칭한

              다. 즉 신라토내당주는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고구려군 사령관’을 뜻한다. 당

              시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모인삼백(募人三百)

              ‘전부 태사자 다우환노’와 ‘주부 귀덕’이 국경 근처 우벌성에서 삼백 명을 모집하고, ‘신
              라토내당주’가 신라 영토 내의 주민을 모은 내용이 기록되 있다. 어떤 목적으로 사람을

              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의 관리나 군사령관이 신라 사람들을 임의로 모을 정





            94
            94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