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5 - 대한사랑 11월호
P. 95
2025. 11
도로 고구려가 신라 영토 내에서 자유롭게 군사권을 발동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
다.
궤영(跪營)
궤영은 고구려 태왕이 행차하여 머무는 행영으로 추측되는데, 충주 고구려비에는 신
라의 왕이 궤영에 이르러 교를 받고 의복을 하사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도 충주고구려비에는 고구려군의 주둔지로 고모루성과 우벌성이 나온다. 고모루성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고모루성수사(고모루성에 파견된 고구려 군사지휘관)
가 전부대사자인 다우환노와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형여제(如兄如弟)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보호를 받고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5세기 고구려가 중원을 차지했을 무렵,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 위치에 있
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동이(東夷)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라고 부른 것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며 신라는 주변의 작
은 나라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천하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라 고구려라는, 고
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모두루 묘지에도 “하백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
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 사방이 이 나라가 가장 성스럽다는 것
을 알고 있다”라고 표기해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매금(寐錦)
매금이라는 용어는 5세 무렵 고구려의 금석문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강자로서 지위를 확보한 고구려가 신라의 왕을 낮추어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에서도 503년, 지증왕이 정식으로 왕호를 사용하기 직전의 과도기에
‘매금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95
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