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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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하였다.

              인도의 굽타 제국은 이러한 에프탈 훈의 침략을 계기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굽타
            제국의 약화를 틈타 지방의 권력자들이 도처에서 흥기하기 시작하여 인도는 봉건적 분

            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수십 년간에 걸친 후나의 침략은 굽타 왕조의 번영 기반이던

            유럽과 중앙아시아와의 무역 활동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인도는 아라비아해를 통해
            유럽에 다양한 사치품들을 수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무역의 위축은 국가의 재정수입

            감소를 초래하였다. 당시 불교는 이러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의 후원에 크게 의존
            하였는데, 무역의 쇠퇴는 인도에서 불교의 쇠락도 가져왔다.

              앞에서 언급한 에프탈 후나의 토라마나 왕은 불교를 숭상하였지만, 그 아들인 미히

            라쿨라 왕은 부친과는 반대로 불교를 탄압하고 힌두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
            를 계승한 후나 왕들도 마찬가지로 힌두교 사원을 건축하는 등 힌두교에 우호적인 행

            보를 보였다. 북방에서 내려온 훈족 왕조가 인도의 문화에 동화되어간 것이다.
              굽타 제국을 몰락으로 몰아넣었던 에프탈도 그 뒤를 따라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인도인들의 반격 때문이 아니라 페르시아 때문이었다. 6세기 중반 페르시아 왕

            코스로우 1세는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급속히 흥기하던 돌궐 제국과 손을 잡
            고 에프탈을 협공하였다. 결정적인 전투는 560년 부하라 근처에서 벌어졌다. 싸움에서

            이긴 페르시아와 돌궐은 옥수스 강을 경계로 점령지를 분할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 전

            투로 에프탈의 세력이 일거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비옥한 트란스옥사니아는 빼앗겼지
            만. 아프간과 북인도에서는 에프탈의 잔존 세력이 7세기 중반까지 살아남았다. 북인도

            에서는 토라마나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유디슈티라 왕(재위 633-670) 때에 와서야 후

            나의 북인도 지배가 카슈미르의 반란에 의해 끝이 났다고 한다.
              당나라 때의 고승인 현장 스님은 630년부터 644년까지 구법승으로서 인도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많은 곳을 여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당
            서역기  에는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에 위치한 바미얀(梵衍那)과 카피사(迦畢試) 등의 나라

            를 언급하고 있다. 그 나라들에는 불교가 매우 번창하여 불교사원도 많고 승려들도 많

            았다고 한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모두 그곳에서 유행하였다. 물론 이 지역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종교적 상상력이 풍부하였던 대승불교였다. 당시 이 나라들을

            지배한 것이 에프탈계였는지 아니면 돌궐계였는지 현장 스님은 언급하지 않았다.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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