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2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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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적기(杜門洞遺蹟記)』에 실려 있다.

              성사제에게 ‘정절공(貞節公)’이란 시호가 내려진 것은 그의 14대 손인 대진(大璡)이 순조
            대에 벼슬을 하였는데, 그의 주청이 받아들여져서 순조 34년(1834)에 전교가 내려졌다.

            그로부터 37년 후(1871년)에 증시(贈諡)가 되었다.











              정절공(貞節公) 성사제(成思齊). 그의 유언대로 죽은 뒤 봉분도 만들지 않았지만 무덤조

            차 없는 것을 아쉬워한 후손들이 1812년에 창녕읍 조산리에 있는 부인 성산 이씨 묘
            옆에 망송각(望松閣)을 짓고 그 안에 망제단(望祭壇)을 마련했다. 망송각 아래쪽에는 신도

            비(神道碑)도 세웠는데, 신도비는 현재 창녕 성씨 시조 묘가 건너다 보이는 대지면 대지
            초등학교 앞쪽으로 옮겨져 있다.

              두문자 성사제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스러져 가는 고려에 대한

            충(忠)은 자신이 지켰지만, 선조(先祖)를 위한 효(孝)는 아들에게 맡긴 게 아닐까! 지금 그의
            충성심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아들을 통해

            남기고 싶었던 효(孝)의 정신은 현재 창녕에 거주하는 90%의 후손들로 남아 있다.









                                                                              정절공 성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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