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1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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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8

                       (순조 8)에 개성 표절사에 성사제의 이름이 오르게 됐다. 그 전에 그의 후손인 성석주(成碩

                       周, 1649~1695년)가 직계 선조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행적을 기록한 적
                       이 있는데 그걸 바탕으로 1809년에 성사제의 유고와 행장초, 신도비명을 수록하여 『두

                       문동선생실기』가 간행되었다.

                        성사제는 신현(申賢, 1298~1377)에게서 수학했다. 신현은 안향과 우탁의 도통(道統)을 이
                       어 이색과 원천석, 정몽주에게 전해준 유학자이다. 신현의 학문과 행적을 중심으로 기

                       록한 책이 『화해사전(華海師全)』이다. ‘화해사(華海師)’란 중국의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고려의 스승이란 뜻으로 신현과 관계된 모든 기록을 의미한다. 이 책은 신현의 문인인

                       정몽주가 원천석에게 전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북부여기』를 편찬한 범세동과 함

                       께 편집해 간행한 책으로 알려져 있
                       다. 그리고 바로 성사제가 『화해사전』

                       증보 작업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화해사전』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그 후손들이 몰락해 비장되어 있다가

                      1931년 강영직이 군산에서 발견해 원
                       본의 오자와 낙서를 바로잡아 편집,

                       교정해서 비로소 간행된 책이다.


                                                                                     두문동선생실기                                        화해사전


                       정절공(貞節公) 성사제

                        두문동 72현을 드러낸 것은 조선시대 영조 대이다. 하루는 영조(1740년, 영조16)가 능
                       행(陵幸)을 하면서 송도를 지나다가 고사(故事)를 찾아 말하기를 “이곳은 충신의 유적이

                       니 마땅히 이를 정포(旌褒)해야 한다”고 하면서 ‘승국충신면계세(勝國忠臣勉繼世)’라는 글귀

                       를 내려주었다. 개성유수 김약로에게 연구(聯句)를 지어 올리라고 명한 뒤에 ‘고려충신부
                       조현(高麗忠臣不朝峴)’이란 일곱 자를 비석에 새겨 세우게 했다고 한다.

                        그 뒤인 1751년(영조 27) 가을에 두문동에 또 비를 세우라고 명하면서 “고려 충신이
                       이제 어디 있는가? 두문동에 비를 세워 절의를 표창하네[勝國忠臣今焉 特監其洞表其節]”라는

                       글을 지어 비면에 직접 어필(御筆)로 쓰고 아울러 음기하였다고 한다. 또한 두문동에 개

                       성 유수인 서종급을 파견하여 충신의 혼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제문이 『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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