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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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로 실시했던 과거제도의 하나)에 올라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면서 거의 20년 동안 제과
를 맡으며 높은 문장과 계책이 모두 선생의 손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성사제의 호는 두문자(杜門子)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
불출(杜門不出)하겠다는 의지를 호(號)에 새긴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호뿐만 아니라 아들의
이름까지도 두문불출의 의미를 담아 ‘두(杜)’라고 고쳤다고 한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王氏鬼 不作李家臣)”고 말
하면서 개성 만수산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부인에게 “선군을 계승할 자가 이
한 점 혈육뿐이니 당신이 데리고 창녕으로 돌아가서 우리 성(成)씨의 후손이 끊이지 않
도록 하오. 내가 죽으면 시신도 거두지 말고 묘도 봉축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요”
라고 당부했다.
『두문동선생실기』와『화해사전』
성사제의 존재가 다시 부각된 것은 1796년(정조 20)이다. 본래 정조 7년(1783)에 조의
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성인(孟姓人:이름을 잃었으나 맹호성(孟好姓)으로 추정됨)의 이름과 서
적을 얻어서 표절사(表節祠)를 세우고 이들을 받들어 모셨다. 그러다가 1796년(정조 20)에
성사제, 박문수, 김충한, 민안부의 사적을 알아서 임금께 상주하였다. 그 결과 1808년
성사제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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