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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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천부경주해』를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 단사학계의 부여사에 대한 인식도 별반 다르지
지 않는다. 계연수는 이형식의 집을 방문하여 않다. 성립된 시기가 다르고 활동한 영역이 각
범세동이 지은 『천리경(穿理鏡)』을 얻었다고 하 기 다른 부여를 하나의 부여라고 인식하고 있
였고 그가 지은 『천부경요해』에 『천리경』을 인 는 것이 가장 큰 오류이다. 『북부여기』 속에는
용하고 있다. 사후 후덕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현 강단사학계에서 알지 못하고 왜곡해석하는
문충(文忠)이다. 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수많은 내용들로 가
동 복만마을에 있고 북구 생룡동에 유허비가 득 차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열 개의 부여와 부
있다. 여 천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북부여기』의 가치 4. 열 개의 부여
범장의 『북부여기』는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 1) 원시부여
국한 BCE 239년부터 동부여가 망하는 CE 22 고조선을 건국한 초대 단군은 부루, 부소,
년까지 261년간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기록하 부우와 막내아들 부여를 두었다. 「규원사화」를
고 있지만, 단군조선의 종말, 북부여의 건국과 보면 “부소, 부우와 막내 아들 부여는 모두 당
전개, 위만왕조의 성립과 멸망, 후기 북부여, 시 수도였던 하얼빈의 서쪽 땅을 주었는데 이
동부여와 서부여의 실상, 갈사부여, 최씨낙랑 것이 곧 구려, 진번, 부여 등 여러 나라이다.”라
국, 한사군, 남삼한 등 현재의 사학계에서 풀지 고 하였다. 『단군세기』에서 “우현왕 색불루가
못하고 있는 난제들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좌우의 사람들과 사냥꾼 수천 명을 이끌고 부
보배로운 서적이다. 여신궁에서 22세 단군으로 즉위하였다”고 했
북부여는 단군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는데, 부여신궁은 백악산 아사달로 지금의 길
고리(link)에 해당되는 나라이다. 고구려뿐만 아 림성 농안 장춘 일대로 단군의 아들 부여가 봉
니라 신라와 백제 삼국의 건국이 모두 북부여 해진 곳이다. 초대 단군의 넷째 아들 부여가
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삼 부여후로 봉해진 땅의 명칭이 부여가 되었고
국유사』 등에는 단편적인 내용만 기술하여 일 이것이 최초의 부여이고 원시부여라고 할 수
목요연하게 부여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는데, 이후의 모든 부여의 명칭은 여기서 유
가 없었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학자들마다 래한다.
중화주의 사관에 경도되어 각자의 생각으로
부여사를 기술하여 더욱더 후학들을 미혹하 2) 대부여
에 하였고 일제 식민사관을 계승한 지금의 강 43대 물리단군 36년(BCE426)에 우화충이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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