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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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게 된다. 기 쉽게 부르는 말이고 연나부부여 또는 낙씨
부여라고도 부른다. CE 22년 가을 7월에 부여
6) 갈사부여(북갈사) 왕의 종제가 만여 명을 데리고 귀순하자 그를
CE 22년 고구려 대무신열제는 군사를 동원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있게 하였다. 그의 등
하여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대소왕이 죽자 여 에 낙(絡) 무늬가 있다 하여 성씨를 낙으로 정하
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에 이 여 주었다. 처음 개원 서북에서 백랑산 계곡으
르러 사냥 나온 해두왕을 죽이고 나라를 세워 로 옮겨갔다. 백랑산은 백록산 대양산이라고
왕을 자칭하였다. 갈사수는 지금의 우수리강 도 부르는데 요령성 객좌현성에서 남서쪽으로
유역이다. 태조 무열제 16년(CE 68년)가을 8월에 26km 떨어진 대릉하의 서쪽 강변에 있다. 중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해 왔고 도두를 우 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진서』 등에 기술된 부
태로 삼았다. 갈사부여(북갈사)는 CE 22년부터 여전은 모두 이 서부여에 대한 기록이다. 『삼국
68년까지 3대 47년간 지속되었다. 사기』를 보면 “문자명왕 3년(494년) 2월에 부여
의 왕과 왕비, 왕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
7) 동부여후(남갈사) 다”라고 하였으니 서부여는 CE 22년부터 494
CE 68년 8월 갈사국의 3대왕 도두가 고구 년까지 473년간 지속되었다.
려에 항복하자 태조 무열제가 도두를 우태로
삼아 살 집을 주고 혼춘을 식읍으로 주어 동부 9) 두막루국(대막루, 대막로, 달말루)
여후로 봉하였다. 광개토태왕비문을 보면 영락 『위서』 「두막루전」에서 “두막루국은 물길
20년(410년) “동부여는 과거 추모왕의 속민이었 국 북쪽 천리에 있는데 옛적의 북부여이다”라
으나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받치지 않거늘 고 하였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자 유
왕께서 몸소 정벌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살았다. 혹 타루하
동부여는 CE 22년에 멸망했는데 이를 계승한 라고도 부르니 동북쪽으로 흘러 흑수로 들어
정치체는 북갈사를 계승한 남갈사의 동부여후 간다”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두막
가 유일하다. 이렇게 보면 남갈사의 역년은 CE 루국의 건국은 광개토태왕이 동부여를 정벌한
68년에서 410년까지 343년이 된다. 영락 20년 즉 410년일 가능성이 크고 나라가
위치했던 곳은 눈강의 동쪽, 동류 송화강의 북
8) 서부여(연나부부여, 낙씨부여) 쪽, 아무르강(흑룡강)의 서쪽일 가능성이 크다.
서부여라는 말은 그 위치가 북부여와 동부 CE 726년까지 제1송화강 유역에서 발해군을
여 또는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구분하 이끌고 북진정책을 지휘하고 있던 대일하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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