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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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두막루국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고 대부여가 성립한 BCE 425년부터 726년까
있다. 지 계산하면 1151년이 되어 천년을 훌쩍 넘게
된다.
CE 726년에 당은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도독부 끝으로 두막루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
를 설치하게 되자, 발해의 무왕은 흑수말갈이 독 금처럼 나라 이름으로 쓰인 경우와 인명으로
자적으로 당과 직접 통교를 하는 데에 대해서 위 쓰인 경우가 있는데 21세 단군때 우현왕 고등
협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무왕은 당이 흑수말갈 을 두막루라고 했고 동명왕 고두막한도 두막
과 공모하여 발해를 공격하려는 것으로 인식하고 루라고 불렀다. 두막루의 두(豆)는 두(頭, 머리, 으
돌궐의 지원아래 동생 대문예와 장군 임아상으로 뜸)의 뜻이다. 고구려의 두대형처럼 가장 높은
하여금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것을 나타내는 접두어이다. 막루는 고을 또는
당의 군사적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대문예가 이 고을의 우두머리(마루)를 의미한다. 고을의 뜻
를 거부하자, 무왕은 대일하로 하여금 대문예를 일 때 두막루국은 최고의 나라라는 뜻이 된다.
대신하게 하였다. 당시 발해는 제1송화강의 중류 고을의 우두머리란 뜻일 때 여러 고을을 다스
를 경계로 하여 흑수말갈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리는 총수, 또는 우두머리 중의 우두머리, 최고
두막루국은 이때 제1송화강 상류 북쪽과 눈강 중 지도자라는 의미가 된다.
하류를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두막 현재 한국사의 부여사에 대한 가장 큰 오류
루국은 당-흑수말갈과 돌궐-실위-발해로 대치 는 각기 다른 부여와 시대구분에 대한 언급이
하는 긴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거의 아무 역할도 없이 마치 하나의 부여만이 있었던 것처럼 기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CE 726년까지 제1 술하고 있는 것이다.
송화강 유역에서 발해군을 이끌고 북진정책을 지 부여사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에
휘하고 있던 대문예(저자의견: 대일하 또는 임아상으 의해 어디에서 언제 건국되어 몇 년간 지속되
로 고쳐야 한다)군과 흑수말갈군 사이에서 두막루 었는지에 대한 종합적 인식이 중요하다. 인물
국은 세력을 잃고 국토가 두 나라에 양분된 것으 및 나라가 위치했던 장소, 그리고 존재했던 기
로 보인다. 간 등을 모두 무시하고 하나의 부여라고만 인
식하는 폐단이 사라져야만 한국사의 잃어버린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두막루국은 410년에 고리 부여사는 올바르게 정립이 될 것이다. 고
서 726년까지 317년간 존속하였다. 부여의 총 려말 복애거사 범장이 지은 『북부여기』는 부여
역년은 북부여가 건국된 BCE 239년부터 두막 사를 정립하는데 가장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
루국이 망한 726년까지 계산하면 965년이 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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