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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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이 있는데 이를 전후하여 각각 사신을 보내 없다.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셋째, 나하 또는 타루하를 건너가서 나라를
이를 보면 485년 이전에 두막루국이 있었다 세웠다고 하였다. 이 나하나 타루하를 정확히
는 명백한 내용이 된다. 서부여는 494년에 고 알 수는 없지만. 이 강이 동북 쪽으로 흘러 흑
구려에 복속되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수(흑룡강)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동류송화강의
이를 보면 두막루국은 서부여가 망하면서 그 하류가 나하나 타루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서
유민들이 이주하여 세운 나라가 아니다. 물론 부여는 요하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 강을
서부여가 존속해 오면서 여러 번 국가가 망할 건너가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가능성이 떨어진
위기가 있었다. 이때 일부의 세력이 북동쪽으 다. 그러나 북갈사 지역인 오소리강 유역에서
로 이주하여 두막루국을 세웠을 개연성도 배제 서북쪽으로 이동하면 송화강의 하류가 되므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필자는 두막루국은 410 이를 건넜다는 「유귀전」의 기록과 일치하게 된
년 광개토태왕에 의해 멸망한 동부여후의 후예 다.
가 이주하여 세운 나라라고 사료된다. 넷째, 410년 광개토태왕의 동부여 정벌시 도
그 이유는 첫째, 『신당서』 「유귀전」에서 자 성을 함락시키고 64개의 성을 깨트렸다고만
신들을 북부여의 후예라고 했는데, 당시 동부 하였지 그 임금을 잡아 왔다는 기록이 없다. 이
여후는 북부여의 옛 땅에 살고 있었고 혈통적 를 보면 이때 동부여의 수장이 무리를 거느리
으로도 금와왕의 막내아들이기 때문에 해모수 고 북서쪽으로 도망쳐 송화강(나하)을 건너 두
의 후예라는 의식이 강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루국을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서부여는 요하 서쪽에 나라가 있었고 혈통적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두막루국의 건국은
으로도 의심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낙왕 광개토태왕이 동부여를 정벌한 영락 20년 즉
을 대소의 종제라고 하였다. 이는 금와왕의 형 410년일 가능성이 크고 나라가 위치했던 곳은
이나 동생의 아들이라는 것인데 돌 속에서 주 눈강의 동쪽, 동류 송화강의 북쪽, 아무르강(흑
워온 금와왕에게 형제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룡강)의 서쪽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두막
혹 있었더라도 해모수의 혈통이라는 의식이 약 루국은 언제 멸망했는가? 『책부원귀』 「외신부」
했을 것이다. 20 포이 제3에 “당현종 12년(개원 12년 즉 724년)
둘째, 「유귀전」에서 고구려에게 망한 나라의 달말루의 대수령 낙개제가 내조했다.”라고 하
유민들이 세웠다고 했는데, 동부여후는 광개토 여 이때까지 두막루국이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태왕에게 멸망당했지만 서부여는 494년 고구 수 있다. 이후 두막루국의 기록은 역사에 나타
려에 귀순할 때까지 고구려에 의해 망한 적이 나지 않는다. 유태용(「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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