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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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통맥바로잡기 | 북부여③







                                      글. 지양미(박사. 리정역사문화콘텐츠연구소대표)










            도왜인인가? 도래인인가?                                여/졸본부여와 동부여/갈사부여에 관한 기록

              한국인과 일본인이 유전적으로 많이 연결되                     은 있지만, 당시에 서부여라는 국호로 존재하

            어 있음은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통해 알려져 있                    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놓쳤던 부여가 있었
            다. 이는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조상들이 일본                     다. 중국의 후한/삼국/진(晉)과 교류했던 부여

            으로 많이 건너갔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의                     로 중국의 역사서에 상세히 나오는 바로 그 부
            야요이시대와 고분시대에는 대륙에서 도왜인                       여이다. 기록은 존재하지만, 구별되지 못한 부

            (渡倭人)이 많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은 그                   여로 역사학계의 부평초이기도 했다. 필자는

            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른다. 관점의 차이                   다양한 부여 연구를 통해 ‘서부여’의 존재를 밝
            지만, 우리는 그들이 왜로 건너갔으니 도왜인                     혔고, 이 나라를 ‘서부여’로 칭할 것을 제안했

            이라 불러야 한다. 야요이시대의 중심은 고조                     다.

            선 유민이었고, 고분시대의 중심은 부여인들이                      동부여는 대소왕이 죽자 6개월도 못 넘기
            었다. 그렇다면 왜를 정복한 부여인들은 누구                     고 왕실이 해체되어 나라가 망해 버렸다. 대

            이며, 왜 그곳을 선택했을까? 특히 부여는 기                    소왕의 막냇동생은 갈사부여를 세웠고, 대소

            마민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배를 타고 섬으로                     왕의 사촌 동생은 그를 따르는 1만여 명과 함
            들어간다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께 고구려에 투항했다. 그런데, 고구려 대무신

            행위로 볼 수도 있다. 과연 부여인들 단독으로                    왕은 그를 부여왕으로 봉한 뒤 낙씨성(絡氏姓)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런 학문적                    을 주고 개원 서쪽에 있던 연나부 지역에 안치

            호기심으로 시작한 연구는 놀라운 사실들을                       했다. 학계에서는 ‘투항’과 ‘왕으로 봉함’이라

            마주하게 했다.                                     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여가 고구려의 제
                                                         후국이 되었다.’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

            Who : 도왜인이 된 부여인은 누구인가?                      다. 대소왕의 사촌 동생은 동부여의 왕이 아니
              요서 지역에 있던 서부여 사람들이다. 북부                    기 때문에 동부여를 고구려에 바칠 자격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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