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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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극단적 선택을 하였고, 왕자를 비롯한 왕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가족들은 옥저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의려왕의
뒤를 이은 의라왕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How : 어떻게 바다를 건넜나?
회복했으나, 선비족의 침입은 계속되었다고 기 부여는 십제(十濟)와 연합하여 백제를 세웠
록하고 있다. 이후 한국 사서들도 이때부터 서 고, 이를 기반으로 바다를 건너 왜를 정복하고
부여의 몰락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 야마토국을 건국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나 발해 역사를 전하는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부여와 백제의 관계에 관한 흥미로운 사료들
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
의려왕은 죽으려다가 “나의 영혼이 아직 죽지 않 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아들인 온조가 서기 전
았는데,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겠는가?”라는 18년에 세운 나라로 그때 국호는 십제였다. 필
생각이 들어 은밀히 아들 의라에게 왕위를 넘기 자는 부여와 고구려 등 중국에 의해 동이라 불
고,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海口)를 건너니 따르 렸던 북방족에 관한 다양한 사료를 남긴 중국
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 의 사서들이 백제 초기 역사를 전하지 않는 것
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에 주목했다. 모두 부여가 빠진 자리에 백제
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백제 책계왕
라고 전하고 있다. 위 기록은 대진국 영토 중 (286~298년)은 태자 시절에 대방왕의 딸 보과
‘정주’에 관한 설명이다. 이 기록으로 두 가지 와 혼인했고, 즉위한 해에 황후 아버지의 요청
사실을 알 수 있고, 한 가지 궁금증을 갖게 한 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
다. 하나는 의려왕은 나약하지 않았고, 다른 하 는 거의 감정싸움 수준의 전쟁을 이어 갔다. 처
나는 이 모든 과정이 은밀히 진행되었다는 사 가 도우려다 본가와 의를 상한 경우라고 볼 수
실이다. 당연히 모용외가 모르게 일이 진행되 있다. 책계왕의 아버지인 고이왕은 율령 반포
어야 했고, 결과적으로 중국 역사에 기록되지 와 관등 체제 등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했고, 책
않은 성공한 탈출(?)이 되었다. 그리고 큰 배를 계왕은 이를 바탕으로 국력을 대외로 확장 시
타고 바다로 나가본 적이 없는 이른바 기마민 키려는 야망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럴 때 필요한
족 서부여가 어떻게 바다를 건넜을까 하는 의 것은 힘을 모아 역량을 키울 수 있는 파트너인
문이 생긴다. 발해만을 건너는 정도는 가능할 데, 대방왕의 구원 요청으로 서로 조력 관계가
수 있겠지만, 대한해협을 건너는 것은 차원이 구축되었다. 대방왕은 앞서 위구태왕이 옛 대
다르기 때문이다. 부여인들에게 대륙의 초원길 방 땅으로의 천도 이후 형성된 서부여왕에 대
은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지만, 바닷길은 해양 한 별칭이다. 백제 무왕(600~641)이 당(唐)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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