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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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8
에게 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 받았다는 『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 가야 왕실은 규슈 가
당서』「백제」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2000 고시마의 가라쿠니다케로 밀려나 그곳에서 구
년대 초까지만 해도 드라마에서 출신 지역을 지봉 노래를 불렀다. 대성동 고분이 3~4세기
호칭으로 사용하는-안성댁, 김포댁 등- 문화 에 기존 무덤을 파괴하고 조성된 고분임은 이
는 꽤 오래된 전통 중의 하나이다. 미 잘 알려져 있다. 부여사 전체 흐름을 이해
백제는 바닷길을 잘 아는 해양 국가이므로 하지 못하는 학자들은 대성동 유물이 부여 유
의려왕의 피난을 도왔는데, 이 사실을 인정하 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부여는 한반도 북부
면 ‘백가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백제라 부르게 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뚫고 남하할 수 없
되었다(以百家濟海, 因號百濟)’는 문구를 이해하게 다고 한다. 그러나 라마동은 요서 지역으로 이
된다. 즉 십제가 부여와 연합하여 백제가 되었 무덤군은 직사각형의 덧널무덤이고, 시신은 관
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棺)없이 부장품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특히 텐
이후 의려왕의 아들인 의라왕도 일행에 합류 리쿤과 첸샨이 실시한 형질인류학 분석을 통해
하여 백제 왕실을 도와 한반도 남부에 있던 가 부여인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이곳에 있던 서
야를 공격해서 열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 부여가 백제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왔다는 사
다. 김해 대성동 고분 유물과 부산 복천동 유 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다.
물이 요녕성 북표(北標) 라마동 유물과 똑같은 한반도 남부를 차지한 부여인들은 4세기경
허리 장식과 청동 대야 대성동(좌), 라마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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