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6 - 대한사랑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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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넘기지 않고 우에게 선양했다고 한다. 그러 의 역사성을 부각하는 한편, 이들을 중화민족
나 실제로 기록에 남은 선양의 사례들은 강압 공통의 조상에 위치시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에 의한 것이었다. 한비자를 비롯한 전국시대 문화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지지하는 효과
법가는 요순 선양설을 부정하여 요임금이 순에 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게 쫓겨난 것으로 말하고 있고, 죽서기년(竹書 요묘의 뒤편에 초라하게 마련된 제조당(諸祖
紀年) 에도 “옛날에 요가 덕이 쇠해서 순에게 구 堂)도 그러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호에
금당했다(堯德衰, 爲舜所囚)”, “순은 요를 구금한 서 알 수 있듯 이 건물은 요순우 이래 생겨난 모
후에 언(偃) 땅에서 단주를 가두어 놓고 부자지 든 성씨의 열조(列祖)를 모신 위패가 봉안되어 있
간에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舜囚堯, 復偃塞丹朱, 使 다. 벽면에는 요순우 이후의 성씨 보계표를 걸
父子不得相見也)”라고 증언하여 선양설과는 상반 어두고 각 성씨의 전승 계보를 설명하고 있다.
된 사실을 전하고 있음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
다. 이 선양설의 전말은 태백일사 의 기록이 영제(永濟) 순제릉(舜帝陵)
더욱 상세하다. 순제릉 운성시(運城市) 염호구(鹽湖區) 명조강(鳴
이러한 속사정을 염두에 두고 요묘의 공간구 條崗) 가에 있다. 이곳에 순제릉이 위치한 것은
성과 각종 기념물을 둘러보면 요순우의 선양 맹자 에 “순(舜)이 명조(鳴條)에서 죽으니, 동이
과 중화민족이 이들의 자손이라는 이념을 대중 의 사람이다.”는 말에 의거한다. 사마천의 『사
의 기억을 강제하는 상징화의 산물임을 눈치챌 기』에는 순제(舜帝)가 남쪽으로 순행하다 창오
수 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거대한 규모, 유적의 (蒼梧)에서 죽어 구의산(九嶷山)에 묻혔다고 기록
진정성을 넘어 그들의 전통시대 역사 만들기에 하였고, 이를 근거로 호남(湖南)의 구의산(九嶷山)
동원된 각종 형상의 이념적 도구들은 요순우 에도 순제릉이 조성되기도 했다. 영제시의 순
요묘 제조당의 성씨 보계표 요묘 제조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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