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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독립운동가 최재형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문영숙 (작가/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2020년이면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일제의 총탄에 순국하신 지 꼭 100년이 된다.


    최재형 선생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다간 일생은 참으로 위대했다. 낯선 땅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동포들을 뜨거운 민족애로 보듬었고, 차별받는 한인들의 보호자가 되었기에 한인들은 최재형 선생을 최페치카라 부르며 존경했다. 최재형 선생은 동양의 카네기라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이루었고, 한인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틀을 마련해 한인마을마다 32개의 학교를 세우고, 후학들의 장래를 위해 일찍이 장학사업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대부 최재형 선생

    최재형 선생은 러일전쟁 후,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위기를 직시하고 많은 재산을 털어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대한의군에게 숙식과 무기를 제공했다. 이범윤, 안중근, 신채호, 이상설, 홍범도 등 조국독립에 뜻을 둔 많은 애국지사들이 선생과 손을 맞잡았고 선생은 대한의군이 국내진공작전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물자와 무기를 지원했다. 일본은 집요하게 최재형 선생을 모함했지만 그때마다 신뢰로 다져온 러시아 인맥을 통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선생의 지원으로 대한의군의 국내진공작전이 승승장구하자 일제는 러시아를 압박해서 대한의군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최재형 선생의 무장지원 활동도 중단시켰다.


    안중근 의사의 후원자

    그러나 최재형 선생은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언론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대양보>와 <대동공보>를 창간하여 운영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국내진공작전을 할 수 없었던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서 단지동맹을 했고 최재형 선생은 대동공보에서 안중근과 함께 하얼빈 의거를 기획했다. 마침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성공하자 최재형은 국제변호사를 보내 안중근을 변호하게 했다. 하지만 일제는 불법살인으로 안중근 의사를 사형시키고 지금까지 그 유해도 은폐하고 있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 순국 후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살폈다. 일본은 하얼빈 의거의 배후로 최재형 선생을 지목했지만 선생은 일제의 간섭을 피해 항일단체인 <권업회>를 조직하여 이상설, 홍범도, 신채호 등과 함께 이끌면서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일본과 싸우는 길만이 있을 뿐

    1914년, 최재형 선생은 재미 독립투사들과 뜻을 같이하여 러시아 한인 이주 5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전 세계에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대대적으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시아 한인 이주 50주년 행사는 무산되고 말았다.

    1917년,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났고 곧 내전으로 치달았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적이었던 일본은 러시아에 내전이 일어나자 러시아 황군인 백군과 동맹을 맺었다. 한인들의 적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이었기에 한인들은 혁명군 편에 서서 일본군이 속해 있는 백군과 싸워야 했다. 조국의 독립을 이루는 날까지 최재형 선생과 독립투사들은 일본과 싸우는 애국의 길을 걸었다.


    최재형 선생의 위대한 최후

    그러나 1920년 4월 4일,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시켜 대대적으로 한인마을마다 방화하고 한인들을 학살했다.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일대에 살던 많은 독립투사들이 붙잡혀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4월 4일 최재형 선생은 파르티잔 전투를 하다 가족들이 걱정되어 급히 우수리스크의 집에 들렀다. 가족들은 일본군을 피해 빨리 도망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최재형 선생은 만약 자신이 도주하면 가족들이 받을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느냐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피신하지 않았다.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여 재판 절차도 없이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말았다.

    가족들은 선생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일본에게 호소했지만 일본은 끝내 시신을 은폐했고 안중근 의사와 함께 지금까지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다.

    최재형 선생은 조국에서 천대받던 노비 출신이지만 러시아 연해주에서 자산가로, 교육자로, 독립운동가로, 언론가로, 자상한 가장으로,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


    1962년에야 건국장 추서

    러시아에서도 선생을 높이 평가하여 니꼴라이 2세 대관식에 한인 대표로 초청을 할 정도였다. 선생은 얀치혜의 군수를 지내고, 러시아 정부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훈장도 많이 받았다.

    대한민국은 해방이 되고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은 후, 두 동강으로 나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애국지사를 기억하고 공훈을 기린 것은 선생의 사후 42년이 지난 1962년에 보훈제도가 생김으로써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정부에서는 선생에게 건국장을 추서하였다.

    남북이 갈려 이념적 갈등으로 대치하는 동안,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선양하지도, 추모하지도 못하다가 겨우 10여 년 전부터 최재형 기념사업회에서 해마다 순국추모식을 해오고 있다.

    나는 2012년, 연해주 탐방 길에서 처음으로 선생의 이름을 들었고, 선생의 삶을 알게 된 후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선생처럼 훌륭한 분을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안타깝고 당혹스러웠다. 아동청소년 작가로서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이제라도 선생을 알려야 한다는 뜨거운 사명감이 가슴에 물결쳤다.

    선생의 삶, 감동의 불꽃으로 타올라야

    최재형 선생은 후대들에게 도전과 용기를 가르친 롤모델이다. 엄청난 부를 이룬 선생은 자신의 재산과 영화와 명예를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또한 동족의 행복을 위해 과감히 내던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선생이 마지막으로 2년 동안 살았던 우수리스크의 고택은 이제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와 최재형기념관으로 꾸며져 올해 3월 28일에 개관되었고 지난 8월 12일에는 기념관 안에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졌다.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이제 최재형 선생의 삶은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가슴을 뒤흔드는 감동의 불꽃으로 타올라야 한다. 그 불꽃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정한 나눔의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할 것이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길이길이 일깨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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