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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아베 정권의 배후, 일본회의] 멈추지 않는 꿈, ‘일본제국을 부활시켜라!’

    이보순 대한사랑 일본 지부 현지 기자

    [프롤로그] 일본인조차 몰랐던 일본 정치의 실체

    2017년, 일본의 정계를 뒤흔들 만한 스캔들이 터졌다. 바로 ‘모리토모 학원(森友学園) 스캔들’이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보도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 스캔들은, 무려 35년간 그 어떤 곳도 구입할 수 없었던 국유지를 모리토모 학원이 시가의 약15%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계약했고, 그곳에 ‘아베신조기념초등학교’라는 일본 최초의 신도 계열 초등학교를 건립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초등학교의 명예 교장 취임 예정자가 다름 아닌 아베 총리의 부인인 아키에였다.

    전대미문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승승장구하던 아베 정권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졌는데, 그럼에도 이 사건의 배후에 ‘일본회의’ 조직이 있다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 사람들은 모리토모 학원은 기억해도 일본회의는 기억하지 못한다. 오직 이 사건을 처음 폭로한 아사히신문 기자들과 좌파 세력만이 아직도 일본회의를 고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본회의는 1997년에 탄생한 우익단체이다. 한국에서는 아베 내각의 80% 이상이 이 단체에 속한 인물들이라고 보도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일본회의는 일본 정치의 꿈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일본회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본의 근대사를 이해해야 하고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이해할 때 일본 정치계의 역사인식이 왜 그토록 우리와 다를 수밖에 없으며, 독도와 위안부 문제가 왜 해결되지 못하는지 일관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조차 이러한 내용을 거의 알지 못하기에 도대체 왜 일본과 한국, 중국 사이에 외교 문제가 벌어지는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어디에 해결책이 있는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생각의 바탕에는 일본회의의 영향력이 어김없이 미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너무도 치밀하고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일관되게 활동해 온 일본회의의 실체를 역사적 사건과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조명해 보고자 한다.


    꿈의 시작 - 일본제국의 성립,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년, 일본은 250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에도 막부(江戸幕府, 현 도쿄를 행정수도로 한 막부체제)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근대국가로 탄생하는 거대한 변혁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은 부국강병과, 일본 천황을 모시고 외세를 거부한다는 존황양이(尊皇攘夷)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일본의 하급 무사들이 상급 무사 사회를 뒤엎은 사건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세운 에도 막부 시대에는 사무라이들이 일본 사회를 지배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사무라이 간에도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의 계급이 존재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상급 무사는 하급 무사를 아무 이유 없이 베어도 처벌받지 않았고, 하급 무사는 상급 무사를 쳐다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이처럼 에도 시대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더라도 정말 운이 좋아서 번주(藩主, 현재 우리나라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권력 계층으로, 당시 번주는 그 지역을 거느리는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에게 발탁되지 않는 한, 하급 무사로 태어나면 평생 하급 무사로 살아야 하는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철저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사회였다.


    에도 말기, 일본을 침략하기 시작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에도 막부가 일본의 평화를 계속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싹텄다. 그래서 사회제도에 불만을 갖고 있던 하급 무사들에게 일본을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다른 지역보다 한 발 먼저 이러한 생각을 가진 지역이 바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 죠수번(長州藩, 현재의 야마구치현山口県)과 사쓰마번(薩摩藩, 현재의 가고시마현鹿児島県)이었다. 이 두 번은 에도 막부의 수도인 에도(현재의 도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해상무역이 용이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쓰마번은 에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쇄국정책을 폈던 에도 시대에도 해외 여러 나라와 몰래 교역을 펼치며 한 발 먼저 근대화를 이뤄 나갈 수 있었다. 특히 과학 기술의 발전을 장려한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덕분에 에도 말기에 사쓰마번은 일본 열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사쓰마번이 메이지 유신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는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죠슈번은 메이지 유신에서 현대의 일본에까지 이어지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 인물이 바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요시다 쇼인은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 할 정도로 현대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요시다 쇼인이 주장한 것이 바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독립국가로서의 일본’이었다. 그런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부가 맺은 외세와의 불평등 조약을 전부 다시 맺어야 하고,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일본을 강력한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선과 만주, 중국까지도 점령해야 한다.”라고 피력했다. 이런 생각이 후일 메이지 정부에서 제기된 ‘정한론(征韓論)’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요시다 쇼인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 정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던 상급 사무라이들에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고, 결국 요시다 쇼인은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형을 당하고 만다. 그렇지만 사형당하기 직전까지 요시다 쇼인은 쇼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사립 학당을 열어 자신의 정신을 이어받을 인재들을 양육했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이어받은 인재들이 결국 메이지 유신의 주체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메이지 유신 3걸 중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조선 초대 통감이며 일본 총리를 네 번이나 맡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1853년에 네 척의 미국 함선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본 근대화의 물결은 결국 1868년에 이르러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일본제국을 탄생시킨 시대적 조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드디어 강대국을 향한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좌절된 꿈 - 일본 제국의 패망

    신정부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각 나라의 국가 원수를 만나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해 줄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서양 강대국을 보고 배우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을 파견하게 된다. 2년여에 걸쳐 서양을 다녀온 이 사절단에 메이지 유신의 주역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107명의 젊은이들이 함께했다. 메이지 정부가 세워지자마자 파견된 이 사절단의 제1 목적이 불평등 조약의 개정 요구라는 점에서 메이지 정부가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계승했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불평등 조약의 개정은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가한 인물들은 후일 실질적으로 일본을 이끄는 멤버가 되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사절단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을 앞장서서 이끌어갔고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는 데 힘썼다.


    동학혁명을 일으킨 동학군을 토벌한다는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에 이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야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같은 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에는 강제로 합병하며 식민지로 삼았다. 한국을 영원한 식민지로 삼기 위해 점령하자마자 일본 제국이 먼저 시작한 일은 다름 아닌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일이었다. 이 일은 제국주의의 주된 명분인 식민지 국가의 ‘문명화’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 주된 내용은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임나일본부설을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한편 단군조선을 신화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는 ‘북쪽은 중국의 한사군으로부터, 남쪽은 일본의 임나일본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관점에서 한국 고대사를 왜곡, 날조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만든 『조선사』가 현재까지도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대로 강력한 일본국을 건설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수립하고, 본격적으로 중국을 점령해 가기 시작했다.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일본의 패망을 불러들이는 시발점이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이때, 일본은 국내적으로 심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대외 확장 정책 때문에 국내 경제 사정이 썩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승승장구했지만 점점 살기 힘들어진 일본 사람들은 정신적 공황을 느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신사상이 유입되자 일본인들은 나라와 정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나라를 강건하게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적 무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국체사상国体思想’이다. 국체사상의 핵심은 1937년 문부성에서 발행한 『국체의 본의(国体の本義)』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万世一系인 천황황조天皇皇祖의 신의 계시神勅를 받들어 영원히 통치되는 나라이며 이를 국체国体라고 한다. 일본은 전 국민이 모두 한 가족이며, 한 마음으로써 국체의 뜻을 잘 받들어 신봉하는 것을 충효의 미덕으로 삼는다. 이 국체는 영원토록 불변하는 나라의 대 근본(大本)이며, 일본은 역사적으로 이를 유지해 왔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자손인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이러한 체제는 세계에서 오직 일본만이 가지고 있는 훌륭함이며, 아름다움이며, 자랑스러움이다.”

    일본 정부는 이 사상을 일반화시키기 위해 ‘국체명징운동(国体明徴運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그 결과 일본 신민들은 현재까지의 힘든 상황은 일본에 맞지 않은 서양 사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일본은 서양제국과 다른 일본만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한 일본 신민들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국체인 천황의 뜻을 실현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 ‘국체인 천황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자손으로서 신의 뜻을 받들고 실현하는 대행자’라는 맹목적인 선민사상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사상과 인식은 곧 태평양 전쟁에서 무자비한 악행을 자행하게 한 바탕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라는 전무후무한 자살 폭탄 테러 작전을 실현 가능하게 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1930년대 후반 국체명징운동으로 사상적인 통합을 이루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서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전쟁을 하면 할수록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 데다가 1941년에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 결과 일본 제국은 1945년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으며 전면 항복을 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 신도본청과 기시 노부스케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다. 요시다 쇼인이 제창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독립국가’는 결국 100년도 못 간 채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승전국 미국은 일본을 영원한 농업국가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게 덤비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손발을 잘라 군대를 보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일본국 헌법에 일본이 국제적으로 어떤 이유에서건 군사적 대응을 할 수 없도록 명시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국 헌법이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하지만 채 5년이 지나기 전에 한국 땅에서 벌어진 민족상잔의 비극은 일본에게 재생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패전 이후 일본은 연합국 최고사령부, 일명 GHQ(Great Headquarter)에 의해 통치되었다. GHQ는 제일 먼저 사상적 근본이 되었던 일본 황실을 없애려 했다. 하지만 일본 황실을 없애버리는 것보다 일본 황실을 명목상으로라도 세워 두는 것이 일본 국민을 다스리는 데 효과적이라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일본 황실을 유지하되 정치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이것을 신도지령神道指令이라 한다. 1945년 12월 신도지령이 내리자 일본 제국의 사상적 근간이었던 국가신도(황국신도)가 정치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6년 1월 1일, 쇼와천황(昭和天皇)은 자신을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선언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제정일치 사회였던 일본이 제정분리 사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일본 국가신도는 이미 신도지령이 내려지기 몇 개월 전부터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신도지령이 내려진 후에도 국가신도의 중심지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신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중심으로 하여 신도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동안 국가신도의 중심축이었던 ‘신기원神祇院’이 폐기된 다음날 ‘신도본청神道本庁’이라는 종교 법인을 발족시켰다. 이 조직은 표면상으로 일개 종교 법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독립의 자유를 얻은 일반 신사들이 이 조직에 들어가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모든 신사가 이 조직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만 천황을 위해 죽은 자들을 모신다는 명목으로 메이지 정부 때 세운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는 신사 본청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종교 법인을 세웠다.


    훗날 신도본청은 15년에 걸친 건국기념일 제정 운동을 완수한 후, 자신들의 의지를 정치에 더욱 쉽게 반영시키기 위해 1969년에 ‘신도정치연맹(神道政治連盟)’을 세웠다. 반 년 후인 1970년에는 국회의원 중에 신도정치연맹과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모여서 ‘신도정치연맹국회의원간담회(神道政治連盟国会議員懇談会)’를 결성했다. 이 단체들이 현재 아베 총리를 지원하는 굳건한 한 축이 되었다.

    일본을 제정분리 사회로 만든 미국이 다음으로 꾀한 것은 일본을 자유민주주의 진영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냉전체제의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국제 전략이었다. 우리에게 전범 재판으로 잘 알려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 받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는, 일본의 자유민주주의화를 위해 미국에게 필요하다는 이유로 미국에 의해 풀려났다. 그리하여 1955년 CIA의 지원을 받으며 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 즉 자민당이 만들어졌다. 이런 사정을 반증하듯 자유민주당이 내건 첫 목표는 ‘반공(反共)’이었다.

    하지만 기시 전 총리는 옛날 죠슈번이었던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크게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래서 기시 전 총리는 1957년, 총리직에 오르자마자 헌법개정(憲法改正)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시다 쇼인이 제창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독립국가’의 재건과 그것을 위한 헌법개정이야말로 기시 노부스케의 꿈이었던 것이다. 그 첫발을 내딛은 것이 미일안전보장조약(일본어로는 日米安全保障条約, 이하 미일안보조약으로 기술)의 개정이었다.

    기시 전 총리는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할 때 미국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로 안보 조약을 맺을 것을 꿈꿨지만, 헌법 9조에 따른 제약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반면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세력의 영향으로, 기시 총리의 새로운 미일안보조약은 일본이 미국의 속국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로 맺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이러한 인식은 ‘60년 안보(60年安保)’라는 일본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정치적 데모로 이어졌다.


    결국 기시 전 총리는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는 동시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헌법 개정이라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기시 전 총리는 자신의 아우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를 비롯한 후임들이 헌법 개정의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기시 전 총리 이후 이어진 자민당 정부는 헌법 개정을 언급하지 않았다. 기시 전 총리는 살아생전 헌법 개정의 꿈을 이룰 수 없었고, 자신의 정치 기반을 외손자 아베 신조에게 물려주며 정치계에서 물러났다. 아베 총리는 실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자신의 목표를 ‘헌법 개정’이라고 명확히 제시하였다. 그것은 외할아버지의 꿈을 자신이 이루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우파의 뇌와 좌파의 팔다리

    ‘생장의 집’과 ‘일본청년협의회’, 그리고 일본회의의 모체가 된 두 단체,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한편, 1930년대 요시다 쇼인만큼 천황 중심의 강력한 일본을 외친 새로운 종교 단체(이하 ‘신종교新宗教’로 기술)가 있었다. 바로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가 1930년에 세운 ‘생장의 집(生長の家)’이라는 단체이다. 이 단체는 처음에 종교 단체라기보다 『생장의 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일종의 출판사로 출발했다. 뛰어난 문학적 감성과 언어능력을 지닌 다니구치는 젊은 시절 일본 신종교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오모토(大本)’에서 기관지機関紙의 편집과 성전聖典인 『오모토신유(大本神諭)』의 편집 작업까지 맡았고 출판사의 간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1921년에 벌어진 일본 정부의 제1차 오모토 탄압 때, 오모토 본부가 교주가 한 예언 중 맞는 것만 골라서 기관지에 실었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오모토를 떠났다. 그 후 여러 종교단체를 다니며 공부하다가 효고현 고베시 스미요시(兵庫県 神戸市 住吉)에 거처를 마련하고 집 근처 모토 스미요시 신사(本住吉神社)에 참배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即是空 空即是色에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깨달음을 잡지로 출판하여 추종자를 불렸다. 1935년, 다니구치는 주식회사 광명사상보급회(光明思想普及会)를 세우고 그동안의 잡지를 모아 『생명의 실상(生命の実相)』(전10권)이라는 성전을 편찬하여 대대적인 신문광고를 하며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제1권만 해도 5만 부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생명의 집은 급격하게 성장하여 1940년에 종교단체법이 시행된 이후 종교결사단체로 인정받았다.

    그 후 다니구치는 “태평양전쟁太平洋戦争은 성전聖戦이고, 모든 법은 천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천황을 섬기지 않는 자는 햇빛을 거부하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다니구치는 천황 중심의 황국신도 사상을 강력하게 주장한 결과 패전 이후 한동안 활동을 금지 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1949년에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자, 다니구치는 천황중심사상과 반공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다시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GHQ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일본국 헌법을 비판하고, 대일본제국헌법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60년 안보 사건을 전후로 우파의 전폭적 지지를 받게 되어 한때 신도가 100만 명이 넘는 대교단으로 성장했다.

    다니구치는 해외 포교도 적극적으로 펼쳤는데,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 곳은 브라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생명의 집은 브라질에 살고 있던 패전국 국민으로서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일본인들에게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일본인 신자들을 대거 영입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60년대에 현지인을 적극적으로 포교함으로써 신도가 250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회의의 해외 지부가 유일하게 브라질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생장의 집은 정치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1964년, 자신들의 뜻을 더욱 확실하게 정치에 반영시키기 위해 ‘생장의 집 정치연합(生長の家政治連合)’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5년 후인 1969년에는 후일 일본회의와 관련이 깊은 다른 종교단체와 함께 ‘자주헌법제정국민회의自主憲法制定国民会議’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의 회장으로 취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였다.

    1960년대 말, 일본은 기시 전 총리가 개정한 안보조약의 갱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학생운동의 물결에 휩쓸리는데 이를 ‘70년 안보(70年安保)’라 한다. 생장의 집은 이러한 학생 운동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1966년에 설립한 ‘생장의 집 학생회 전국총연합(生長の家学生会全国総連合, 이하 생학연으로 기술)’이 바로 그 중심 조직이었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우파(민족파라고도 불림) 학생운동의 중심 인물이 바로 가바시마 유조(椛島有三)이다.


    생학연에 가입한 가바시마는 동료들과 더불어 좌파 학생들의 쿠데타로 봉쇄되어 있던 나가사키대학 캠퍼스를 다시 개방시키며 ‘학교 정상화’를 이루었다. 이 사실이 뉴스를 통해 알려지면서 점차 세력이 늘어 ‘큐슈학생자치연락협의회(九州学生自治連絡協議会)’를 만들게 되었고, 1969년에는 ‘전국학생자치연락협의회(全国学生自治連絡協議会, 이하 전학연으로 기술)’로 성장하면서 전국 우파 학생들의 중심이 되었다. 1970년에는 전학연의 졸업생들을 모아 ‘일본청년협의회(日本青年協議会)’를 설립하여, 졸업 후에도 우파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꾀했다. 하지만 안보조약이 자동 갱신되어 좌파운동은 자연스레 힘을 잃어갔고, 상대를 잃은 우파운동도 갈 곳을 잃어버렸다.


    그때 자연스럽게 손을 내민 곳이 다름 아닌 일본회의의 모체가 된 두 단체 중 한 곳, ‘일본을 지키는 모임(日本を守る会)’이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무라카미 마사쿠니(村上正邦)이다. 훗날 ‘참원의 법왕(参院の法王)’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게 되는 무라카미도 이때는 아직 생장의 집 대표로서 일본을 지키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1974년 4월 2일, 당시 일본에 팽배한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고 애국심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신도본청의 메이지 신궁이 중심이 되고 생명의 집 교주 다니구치 마사하루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신종교 교주가 모여서 만든 단체이다. 이 단체의 첫 목표는 쇼와(昭和)라는 연호를 사용하는 데 필요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하는 원호법제화(元号法制化)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활동기관이 필요했다. 정치적인 사상이 같고 실적까지 갖춘 가바시마가 이끄는 일본청년협의회가 더도 덜도 없이 딱 맞는 단체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하여 1977년 일본청년협의회는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사무국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78년 메이지 원호 제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원호법제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운동 방침은 국회와 정부를 움직이기 위해, ‘1. 전국 각지에서 이 문제에 대해 논하고 활동하는 조직을 만들고, 2. 현의회나 시의회, 구의회 등의 정치 분야에서 원호법제화를 요구하는 의결서를 받아, 3. 그것을 정부와 국회에 제출하여 원호법제화를 통과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 방침은 현재 일본회의에서도 일관되게 시행하는 활동 방향이다. 지방에 여러 조직을 만들고 논의를 활성화시켜, 각 지역 자치제의 의결을 받고, 국회와 정부에 제출하여 뜻을 이루는 방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듬해인 1979년에 원호법제화가 이뤄지게 되었다. 학생활동을 주도해 온 가바시마였기에 단기간에 그런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생장의 집은 1983년 2대 교주가 취임하면서 정치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유지해 온 우익노선을 뒤집어 좌익단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제까지 태평양 전쟁을 성전이라 주장했던 것과 정반대로 태평양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인정했다. 이런 생장의 집의 노선에 반발하여 기존의 신도들이 모여 만든 원리주의 단체가 ‘다니구치 마사하루를 배우는 모임(谷口雅春を学ぶ会)’이다. 현재 아베 총리 주변에는 생장의 집 출신 멤버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이 원리주의자 노선을 따르는 멤버이다.

    한편 원호법제화 운동의 과정에서 일본회의의 또 다른 모체가 되는 새로운 단체가 형성되는데, 그곳이 바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日本を守る国民会議)’이다. 이 단체는 1978년에 만들어진 ‘원호법제화실현국민회의(元号法制化実現国民会議)’를 모체로 하여, 1981년 10월 27일 우파 정치인과 문화인들이 만들었다. 창립 당시 메이지 신궁의 부궁사가 사무총장을 맡고, 이부카 마사루(井深大) 소니 명예회장, 우노 세이치(宇野精一) 동경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하였다. 창립식에는 약 8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는 등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단체는 처음부터 생장의 집, 신도본청, 통일교 등의 후원을 받으며 시작했는데 단체의 사무를 맡은 곳은 가바시마 유조의 일본청년협의회였다.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의 제1 운동 목표는 ‘헌법 개정’이었다. 그리고 그 외 목표는 애국심 함양, 교육제도 재검토, 자위대 지위 향상, 천황의 국가원수화 등이었다. 이런 목표는 현재 일본회의로 계승 발전되어 현재의 일본회의 역시 이와 같은 것을 활동 목표로 삼고 있다.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의 기관지 『일본의 숨결(日本の息吹)』도 그대로 일본회의에 계승되었다.


    이 단체들은 1997년 일본회의가 탄생할 때까지 일본 정치계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일본회의가 탄생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1995년에 있었던 ‘전후 50년 결의(戦後50年決議)’이다. 문제의 핵심은 태평양 전쟁이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문구를 넣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가바시마는 적극적으로 국민운동을 벌여 약 1년 만에 500만 이상의 사죄 결의 반대 서명을 모아 국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이 이뤄지던 날, 가바시마를 비롯한 50명의 우파 단체 간부들이 국회 참의원 회의실에 모여 무라카미 마사쿠니를 압박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일본사회당日本社会党과의 연립을 유지해야 했던 자민당의 농락으로 말미암아 우파 단체 간부들은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하며 사상 최대의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 일본회의의 탄생과 제국주의 사상의 대두

    1997년 5월 30일 일본회의가 탄생했다. 무라카미 마사쿠니의 주도로 신도 본청과 신종교의 모임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우파 정치인과 문화계의 모임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하나가 되고, 가바시마 유조의 ‘일본청년협의회’가 사무국으로 자리 잡으면서 탄생한 것이다. 일본회의의 탄생은 오랜 시간 공들여 키운 우파 세력의 총 결집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단체의 결성과 동시에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日本会議国会議員懇談会’도 탄생하였다.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의 구조는 신도본청의 조직 시스템과 유사하다. 실제로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에 가입한 인물이 대부분 신도본청의 신도정치연맹이 만든 신도정치연맹국회의원간담회에도 함께 가입했다.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에는 2015년 9월 15일 현재 약 281명의 국회의원이 소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대부분이 자민당 의원이다.

    일본회의와 신사 본청이 만든 신도정치연맹은 정치 목표도 거의 같다. 그것은 ‘1. 국체로서의 황실을 원수로 하는 명예로운 일본 사회 만들기, 2. 헌법 개정, 3. 교육 개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목표는 현재 아베 총리의 정치행보와 맥락을 같이하는데, 제1차 아베 내각 때 아베 총리가 먼저 시행한 것이 바로 교육기본법의 전면 개정이었다. 아베의 현재 목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천황을 국가 원수로 지정하고, 전쟁이 가능한 강력한 독립된 일본을 세우는 것이다.

    일본회의의 총 회원은 2016년 현재 3만8,000명으로 추정된다. 지부는 전국에 243개, 해외에 1개(브라질)가 있다. 현재 홈페이지에서 확인되는 정보로는 일본 전국에 지방본부가 있고, 중앙본부 간부는 약 400명, 지방 간부는 약 3,100명이 활동 중이다. 정회원 제도로 운영되는데 한 사람당 연회비를 만 엔씩 받는다. 그것만으로도 약 4억 엔에 가까운 재정을 확보하여 운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관지의 발행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하며, 꾸준히 새로운 책을 발간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일반 일본 서민들이 일본회의라는 이름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일본회의는 절대 시민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회의는 다양한 하위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한다. 대표적인 단체로 ‘아름다운 일본 헌법을 만드는 국민들의 모임(美しい日本の憲法を作る国民の会)’, ‘21세기의 일본과 헌법(21世紀の日本と憲法)’, ‘유식자 간담회(有識者懇談会)’, ‘메이지의 날 추진협력회(明治の日推進協議会)’, ‘모두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민들의 모임(みんなで靖国神社に参拝する国民の会)’, ‘일본의 건국을 축하하는 모임(日本の建国を祝う会)’, ‘평화안전법제의 조기 성립을 요구하는 국민포럼(平和安全法制の早期成立を求める国民フォーラム)’ 등이 있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소규모 단체들은 일본회의가 이루려는 정치 목표를 실질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배후에 일본회의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소규모의 조직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접근하고, 조금씩 조금씩 국민들의 인식을 바꿔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회의의 사상은 어떠할까? 일본회의의 중심 테마라 할 수 있는 교육, 가정, 역사인식, 야스쿠니 신사를 테마로 일본회의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먼저 교육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일관되게 ‘패전 이전의 교육 체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패전 이후의 교육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회의 기관지 『일본의 숨결』 1998년 6월호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지금의 일본 교육은, 이지메(집단 괴롭힘)나 교내 폭력이 급증하여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 청소년 비행도 패전 이후 최악의 사태로 치달을지 모른다. 이러한 배경에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1. 학력주의에 의한 편차치지상교육偏差値至上教育
    2. 과도한 인권교육
    3. 유명무실한 도덕교육
    4. 우리나라 역사를 단죄하는 자학적 역사교육
    5. 학교 현장에서 반 이데올로기를 가르치는 일본교직원조합의 교육

    일본회의는 이러한 교육이 GHQ로부터 강요당한 잘못된 교육이라 주장한다. 아베 총리는 2006년, 교육기본법을 전면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더불어2007년에 결성한 ‘개정교육기본법에 의거한 교과서 개선을 추진하는 유식자들의 모임(改正教育基本法に基づく教科書改善を進める有職者の会)’은, 대표적인 우익 신문사 산케이신문(産経新聞)의 자회사로 2007년에 탄생한 육붕사育鵬社가 만든 교과서를 전면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육붕사는 일본회의의 의향을 전면적으로 반영한 교과서를 만들었다. 2015년 현재 육붕사의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약 600곳에 이른다.

    다음으로 일본회의의 가족관에 대해 살펴보면, 일본은 패전 이전까지 국가의 형태를 ‘한 가족’으로 명시했는데, 바로 천황을 아버지로 삼는 가족관이다. 일본에는 가부장적 가족 개념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가정에서의 천황은 곧 아버지라는 20세기 초기의 인식 때문이다. 일본회의는 지금도 가족의 모습에 대해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는 것이야말로 일본다운, 전통적 가족 형태라 주장한다. 따라서 ‘부부의 성을 따로 쓰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가족의 연대감이 떨어져 결국에는 가족이 붕괴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하며 반대한다. 심지어 부부의 성을 따로 쓰자는 주장에 대해서 ‘일본을 안에서부터 해체시켜 무너뜨리려는 반일정책 중 하나’라고까지 말한다. 헌법 개정을 통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을 건설하려는 일본회의의 관점애서 볼 때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관은 필수불가결한 문제인 것이다.

    셋째로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일본회의의 역사 인식은 간단히 말해 ‘태평양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고, 전범 재판이라 불리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은 GHQ에 의해 일방적으로 행해진, 승전국의 사상에 억지로 꿰어 맞춘 잘못된 재판이며, 일본 내에서 일부 주장되는 일본 제국시대를 비판하는 논리는 자학사관’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태평양 전쟁이 아시아 국가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며 ‘대동아전쟁大東亜戦争’이라는 용어를 고집한다. 태평양 전쟁은 결코 침략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벌어진 모든 일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 주장한다. 그래서 종군 위안부, 강제 노역 등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천황을 위해 신민으로서 당연하게 행해진 일로, 강제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에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담화에는 전쟁을 벌인 주체가 누구인지, 피해를 받은 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잘못이 이뤄졌는지 전체적으로 애매모호하게 기술되어 있다.

    고대사에 대한 역사 인식도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의 입장과 마찬가지이다. 육붕사의 책을 보면 ‘광개토대왕비문에 왜가 삼한을 정벌한 증거가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가야를 임나라 표기하고, 임나일본부를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것을 살펴보자.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메이지 유신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것이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전쟁 때 천황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는 충혼사忠魂社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패전 후에는 A급 전범까지 모셔지면서 국제사회의 이슈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참고로 일본 천황은 A급 전범이 모셔지기 3년 전인 1975년의 참배를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행하지 않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을 기리는 것이 불쾌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일본회의는 ‘모두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임’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행하고 있다. 2019년에도 춘례대제(春例大祭) 때는 70여 명의 국회의원이, 8월 15일에는 50여 명의 국회의원이 대거 참배했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2014년 12월 이후,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이뤄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럼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회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존재일까?


    실은 일본회의가 강력하게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한 유일한 국민운동이 있다. 바로 ‘야스쿠니 신사 국가보호유지법 제정 운동(靖国神社国家護持法制定運動)’이다. 이 운동은 GHQ의 신도지령 때문에 국가기관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야스쿠니 신사를 다시 국가재정으로 유지 및 보호하는 법을 제정하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 약 20년간에 걸친 서명운동에 호응하여 서명한 사람이 1,20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중에 종교탄압을 받은 종교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회에서도 야스쿠니 신사를 종교 법인이 아닌 특별법인으로 만들어 종교적 색채를 없애는 방향으로 타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오히려 신도본청과 야스쿠니 신사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종교 법인으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는 ‘제정일치’를 꿈꾸고 있었다는 것이 세간에 드러나면서 이 운동은 무산되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분열된 종교계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탄생한 것이 일본회의의 두 모체 단체 중 하나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다. 결국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회의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곳으로 제정일치의 일본 제국주의 시스템을 부활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 중 하나인 것이다.

    [에필로그] 강경한 일본을 꿈꾸며, 오직 한길로

    2019년 9월 11일, 아베 총리는 제4차 개정내각이 발족됐다. 총 20명의 내각 중, 19명이 자민당 의원이고, 그 중 18명이 일본회의나 신도정치연맹에 가입한 인물 즉 ‘개헌파’이다. 아무데도 가입하지 않은 나머지 한 명은 이번에 처음으로 내각에 임명된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아들, 고이즈미 신이치로이다. 하지만 고이즈미 신이치로도 중의원에 당선된 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적이 있다. 아베 총리를 처음으로 내각에 기용한 사람이 고이즈미 전 총리임을 감안하면, 고이즈미 신이치로도 아베 총리와 같은 노선을 걸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Litera」는 9월 11일자 기사에서 이번 정부를 일컬어 역사상 최악의 극우파 내각이 탄생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개정내각은 임기 내에 헌법을 개정하고야 말겠다는 아베 총리의 강력한 의사 표출이다. 이번 내각에서는 제2차 아베 내각 때부터 일관되게 보좌관으로서 아베 총리의 뒤를 받쳐 주던 에토 세이치(衛藤 晟一)를 일억총활약담당상에 임명했는데, 에토 씨는 일본청년협의회의 전 위원장으로, 생장의 집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이다.

    아베 내각의 실질적인 브레인은 생장의 집의 주요 멤버들로 이루어졌다. 그 중 대표격이 이토 데쓰오(伊藤哲夫) 일본정책연구센터장이다. 이토 센터장은 생장의 집에서도 브레인 역할을 했다. 이토는 생장의 집이 좌파 노선을 걷기 시작하자 원리주의자들과 함께 독립하여, 일본정책연구센터를 세우고 정치에 지속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고이즈미 총리의 주선으로 아베 총리를 만난 이후 일관되게 아베 총리의 브레인 구실을 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메이지 유신 이후 강력한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걸어온 일본 근대사의 정신을 총 집약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 이후 숨죽이며 지켜올 수밖에 없었던 야망을 실현할 인물로 아베 총리가 탄생한 것이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아베 총리는 처음부터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9월 11일, 제4차 아베 개정내각 발족 기자회견에서 아베 총리는 “이번 내각은 새로운 시대의 나라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인물로 재정비했으며, (아베 내각이) 7년째를 맞이하였지만 항상 도전자의 정신으로 모든 정책 분야에 지금까지의 형태를 고집하지 않고 담대하게 개혁해 나가겠다.”라고 발표했다. 역사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지금까지의 형태에 고집하지 않는다’는 뜻이 단순한 변화를 뛰어넘어 판을 완전히 뒤집겠다는 선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일본회의와 아베 총리는 헌법을 개정할 거의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헌법 개정을 위한 1,000만 서명 운동은 이미 완성된 지 오래이고, 계속되는 중국과 북한의 위협은 일본회의 산하 단체가 활동하기 좋은 여건을 계속 제공하고 있다. 이번 한일 무역 전쟁도 일본이 자력으로 자신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면관계상 헌법 개정을 어떤 식으로 계획하고 있는지 자세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으나, 간단히 정리하자면, 신성한 국가 일본의 원수는 ‘천황’임을 분명히 하고, 일본 국민은 천황을 중심으로 다시 뭉쳐야 하며, 천황의 대리로서 정치를 행하는 총리에게 특별 시국에 ‘헌법’조차 뛰어넘어 국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면 국민들은 이를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개정 헌법의 큰 틀이다. 다시 말해 ‘일본 제국주의의 완전한 부활’이야말로 헌법 개정의 최종 목표인 것이다.

    일본은 지난 100여 년간 일관된 정책으로 일본의 부국강병을 꿈꾸었고 이제 그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패전국이라는, 어떻게 보면 국제정치적으로 가장 힘든 상황에서 일본은 한결같이 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가 되어 움직여 왔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광복70년이 지났건만 일관되게 꿈꿔 온 나라의 비전이 있었던가.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해답은 우리의 바른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환국으로부터 약 일만 년간 유지되어 온 우리의 정신을 되찾을 때, 우리는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명확히 할 수 있고, 현재 우리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일본에게는 100년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10,000년이 존재한다. 그 정신의 부활을 꿈꾸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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