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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특강]

    [왜곡된 역사 교과서] 중화사관과 식민사관에 물든 한국사 교과서 (2)

    최재목, 최지은 대한사랑 기자

    지금 동북아는 역사전쟁 중이다. 100년 전 제국주의에 둘러싸인 대한제국의 위험한 형국과 비슷하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다시금 군국주의軍國主義로 회귀하려 한다. 아베 정권은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을 희생시킨 일본은 여전히 반성 없는 질주를 꿈꾸고 있다. 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자신들의 조상이 자행한 만행을 후손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원자폭탄의 피해자임을 강조한다.

    중국은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그동안 현재 중국 영토에서 있었던 모든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라 칭한다. 북한 지역을 기자조선설과 위만조선설에 근거하여 중국의 강역으로 여긴다. 2017년 4월, 시진핑 주석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망언(2017년 4월)을 했다. 왜곡, 조작된 역사를 국제사회에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대한민국과 이웃한 두 나라 지도층의 역사 인식은 100년 전만큼이나 동북아시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그러면 동북아의 역사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중·일 역사 대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나 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00년 전에 일어난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해야 할 대한인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한의 국통맥을 명확하게 잡고, 외교의 장에서 지혜롭게 대처하고 있는가

    이에 본고는, 지난 호에 실은 ‘단군조선의 실재에 관한 왜곡’에 이어서 ‘날조된 위만조선과 진국辰國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날조된 위만조선과 한반도 진국의 실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어떤 나라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으레 “고조선이요.”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대다수 국민들이 고조선을 한민족의 최초 국가로 알고 있지만 사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은 신화의 나라”라고 부정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군조선에 대한 부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단군조선의 영역은 만주와 지금의 북한 지역으로 국한되고, 한반도 남쪽은 ‘진국’이란 나라로 탈바꿈했다. 현 교과서를 비롯한 수많은 역사서에는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말하며, 한반도 남부에 진국辰國을 설정하여 단군조선의 영역을 평양 중심으로 축소되어 있다.


    과연 진실인가 위만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국통의 중심인물인가 그리고 단군조선과 진국의 관계는 무엇인가 중화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의 교묘한 논리로 오염된 교과서를 만나보자.

    번조선의 왕위를 찬탈한 위만

    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단군조선의 계승자가 준왕과 위만으로 기술되어 있다. 더욱이 ‘위만조선의 발전’을 칭송까지 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의 성장’이라는 소제목 아래 위만을 놓는다. 한마디로 위만에 의해 단군조선은 국가 체계를 세웠고, 성장했다는 말이다. 위만이 망명하면서 철기 기술자도 데려왔을 것이고, 우수한 철기문화의 힘으로 위만조선은 정복사업을 활발하게 펼쳐 고조선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8조금법까지도 위만에 의해 지정되었다고 기술한 교과서도 있다. 그리고 위만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기술한다.

    위만은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했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이러한 점에서 위만 조선은 단군 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래엔 고등교과서)

    이렇듯 현 교과서는 위만을 단군조선의 정식 계승자이자,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인 인물로 설명한다.

    위만은 칭송받을 영웅적 제왕인가

    위만은 누구인가 그리고 위만이 한국통사의 중심인물로 칭송받을 영웅인가 현 교과서는 결론적으로 위만을 단군조선을 성장시킨 영웅적 제왕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것(위만조선)은 우리의 변방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서로 의견이 엇갈리는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군조선의 통치정신부터 알아야 한다. 단군조선은 하늘에 고한 제천문인 「서효사誓效詞」에서 전한 것처럼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로 다스렸다.


    삼한관경이란 삼신사상에 따라 단군조선의 광활한 영토를 중앙의 진조선, 서쪽의 번조선, 한반도의 마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린 방식이다. 만주와 요동일대에 자리 잡은 진한(진조선)을 대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좌우에 있는 번한(번조선)과 마한(마조선)에 부단군을 두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그런데 단군조선 후기에 오면서 삼한관경제가 무너져서 부단군도 각기 병권兵權을 갖게 되었다. 중앙 진조선의 힘이 그만큼 약화된 것이다.

    BCE 239년경에는 진조선의 마지막 단군 47세 고열가 단군이 입산하시고, 그 1년 전에 일어난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가 국통을 잇게 된다. 그리고 중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던 번조선은 40년 정도 더 존속하였다. 진조선이 망한 이후 남아 있던 이 번조선에 위만이라는 자가 들어왔다. BCE 195년의 일이다. 사마천이 『사기』 「조선열전」에서 이 위만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왕만자 교연인야(朝鮮王滿者 故燕人也) 조선왕 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왕노관반 입흉노 만망명 취당천여인(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고 위만은 망명하여 무리 천 여 명을 모았다.

    퇴결만이복이동주출새 도패수(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거진고공지상하장(居秦故空地上下鄣)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장으로 동으로 달아나 변경을 넘고 패수를 건너 진나라 옛 빈 땅 상하장에 거처하다가

    초역속진번조선만이 급고연제(稍役屬眞番朝鮮蠻夷 及故燕齊) 망명자왕지 도왕험(亡命者王之 都王險) 조금씩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옛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한 자들을 예속시켜 부리고 다스렸으며 왕험을 도읍으로 삼았다.


    사마천은 ‘조선왕만자는 고연인야’라는 말로 「조선열전」을 시작했다. 이 구절을 맹신하면 조선의 역사는 위만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된다. 비록 사마천이 칭송받는 인물이지만 철저히 중국의 관점에 서서 기록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후에 일본 학자들은 이 기록을 근거로 삼아 ‘봐라, 너희들 역사는 위만조선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역사왜곡의 빌미가 「조선열전」에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 쓴 역사 기록을 100% 그대로 믿으면 한국인은 뿌리 없는 부평초가 되고 만다. 역사 대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한사관으로 대한의 역사의 뼈대를 세운 다음에 이웃나라 역사문헌을 함께 검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시조 단군왕검을 전하고, 『단군세기』는 2,096년을 다스린 47분의 단군조선 통치자의 치적을 전한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머리와 몸통을 무시하고, 꼬리에 해당하는 위만을 최초의 조선 왕이라 칭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역사의 망령이 저지른 얼토당토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위만의 이야기를 해 보자.

    위만은 자신을 거두었던 노관이 흉노로 달아나자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번조선의 준왕에게 망명을 신청하였다. 『북부여기』에 따르면 진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해모수 단군은 위만이 배신할 것이라 하여 준왕에게 받아주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번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물리칠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중국과의 국경지역인 상·하운장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겼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긴 격이었다.


    변방의 수비대장을 맡으며 몰래 군사를 모은 야심가 위만은 다음해인 BCE 194년,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으로 쳐들어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위만의 급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준왕은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배를 타고 한반도 남쪽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삼조선의 마지막을 지키던 번조선이 허무하게 망하고, 단군조선의 역사는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패수는 어디인가? 왕험성은 어디인가?

    위만이 건넜다는 패수는 어디인가 그가 빼앗은 왕험성은 어디일까

    요동군 험독현 응소應劭(후한 때인 서기 2세기 무렵 인물)는,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물이 험한 데 의지했으므로 험독險瀆이라 불렀다’고 했다. 신찬臣瓚은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 이로부터 험독이라 했다’고 했다. 안사고顏師古는 ‘신찬의 설이 옳다’고 했다. (『한서』 「지리리」 ‘요동군 험독현’)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 권14. 「패수」)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의 기점이다. (『사기』 「하夏본기」에 인용된 『태강지리지』의 주석)

    고대 역사지리서인 『한서』 는 왕험성이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경』은 패수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런데 일제식민사관 추종자들은 한반도에 있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을 패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강들을 모두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이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에 망명했다고 기록했다. 만약 패수가 압록강이나 청천강, 대동강 등 한반도의 강이었다면, 위만이 ‘남쪽’으로 건넜다고 해야 한다. 패수는 어디인가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인 요서지역에서 패수를 찾아야 한다. 연나라 영토까지 통일한 진시황이 진나라 동쪽 끝으로 여긴 갈석산이 있던 근처나 더 서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럼 왕험성은 어디인가 『한서』는 왕험성이 패수를 건너 동쪽에 있다고 했다. 왕험성도 패수와 마찬가지로 그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패수가 한반도의 강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한 것처럼 왕험성도 요서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단재 신채호 선생은 「평양패수고」에서 왕험성을 개주시 조금 위의 요령성 해성海城시라 했고, 위당 정인보 선생 역시 『조선사연구 상』(1946)에서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 평양과 원래 무관하다’면서 해성현을 왕험성 자리로 보았다.


    잘못된 패수 비정을 통탄한 조선의 선비

    조선 순조 때 김경선金景善(1788~1853)은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쓴 기행문에서 패수 비정이 잘못되었다고 통탄했다.

    오호라!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 한사군의 땅을 망령되게 파악해서 모두 압록강 안에 국한시켜 억지로 사실에 끌어 맞춰서 구구하게 분배했다. 이에 패수浿水를 다시 그 중에서 찾으니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지목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지목하고,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 지목했으니 이것은 전쟁을 하지 않고 고조선의 옛 강토를 저절로 줄어들게 한 것이다. (『연원직지燕轅直指』 「봉황성기」)

    사마천의 『사기』를 다시 보라. 위만이 연나라 수도(북경 근처)에서 동쪽으로 달아나 패수를 건너 단군조선 강역으로 망명했다고 했다. 왕험성이 대동강 평양이었다면 1천 명을 이끌고 온 위만이 과연 북경부터 평양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었을까 수·당 군대도 어렵게 온 만주 요서, 요동 지역을 위만 무리는 국가적 지원도 없이 수백km를 쉽게 이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중국의 고대 문헌들은 위만의 도읍지가 현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 한다. 하지만 현 교과서는 위만의 왕험성을 대동강 평양으로 비정한다. 왕험성을 대동강 유역 평양성이라고, 마치 유일한 정설인 양 못 박아 놓았다. 최근 교과서를 보라. 대다수가 이전 검정본보다 더 강력하게 대동강 평양 지역을 위만의 왕험성과 한사군의 낙랑이 있었다고 적고 크게 그려 놓았다. 이러한 설을 주장하는 사학자들의 안타까운 ‘매국의 몸부림’은 오늘도 우리 아이들의 역사의식을 좀먹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아직도 대한민국을 점령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일본은 우리 역사의 출발을 ‘위만조선’으로 주장해 왔다. 조선은 우리 민족이 본래 독자적으로 세운 나라가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위만을 우리 고대사의 원조로 만든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BCE 194년부터 위만조선이 시작되니 조선의 역사는 약 2,200년밖에 안 된다. 일본의 2,600년보다 짧은 역사다. 일본은 조선인이 연나라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그것도 일본보다 늦게 시작하는 것으로 조선의 역사를 꾸며 냈다.


    광복 후, 안타깝게도 일본인 스승 밑에서 배운 이병도 등이 국사학과를 장악했고, 그 영향으로 3~4대를 내려온 지금까지도 일제 식민사관이 단군조선 기술의 뼈대로 남아 있다.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며,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의 표본일 뿐이다.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은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 선생도 ‘위만은 일개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진국

    진국辰國은 BCE 3~2세기경 단군조선의 남쪽에 있었던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사학계의 거두였던 이병도는 “우거왕은 한漢의 유민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고 남방의 진국辰國이 한에 교통하려 함을 방해하였다.”라고 서술하였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이러한 진국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고조선이 북방에서 … 발전할 무렵, 한반도 남부 지역에도 … 여러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을 통합했던 나라가 진辰이다.” 중학교 역사 상, 지학사, 2010, 36쪽

    “고조선이 한창 발전하고 있을 무렵,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진辰이 성장하고 있었다. 고조선 멸망 후, 고조선 사람들이 진에 들어오면서 …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가 성장하였는데 이를 삼한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한국사, 법문사, 2010, 21쪽

    그렇다면 진국은 정말 한반도 남쪽, 단군조선 아래에 있던 나라일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진국의 위치가 서술되어 있다.

    조선상 역계경 이간우거불용 동지진국(朝鮮相 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왕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

    조선의 관료 상相 역계경은 위만 정권의 ‘동쪽’에 있는 진국辰國으로 갔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이병도는 진국이 단군조선, 위만정권의 ‘남쪽’에 있었다고 바꿨을까 그것은 위만정권의 중심지를 이미 대동강 유역으로 비정했기 때문에 역계경이 동쪽으로 간 그 진국은 함경도 지역이 된다. 그러나 진국은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강단사학의 큰 스승’인 이병도는 방위를 틀어서 ‘남쪽’이라 주장한 것이다. 이병도는 이처럼 1차 사료의 방위를 아무렇지 않게 조작해서 단군조선 후기 역사를 한반도로 축소시키려 했다.

    그런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역계경이 갔다는 그 진국이 어떤 나라인지 밝힌 부분이 있다. “(진조선과 번조선과 막조선) 이를 총칭하여 단군 관경이라 하니 이것이 곧 진국이다. 역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진국은 천제의 아들[天帝子]이 다스리는 곳”이라는 것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진한은 옛 진국[辰韓古之辰國]”이란 기록과 『후한서』 「동이전」에 있는 “삼한은 모두 옛 진국[三韓皆古之辰國]”이라는 기록도 「삼한관경본기」 내용과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진국과 단군조선은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단군조선 전체를 부르는 명칭이 바로 진국辰國인 것이다. 진국이 단군조선이라는 또 다른 기록도 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 한반도와 만주에 있던 한(삼한), 부여, 비류, 신라, 고구려, 남·북옥저, 예, 맥 등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었다고 밝혔다. 신라와 삼한은 모두 한반도 남쪽에 있던 나라들이다. 이들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이 한반도 남부까지 지배했음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의 강역을 보여주는 표지유물(청동거울과 비파형동검)이 한반도에서 많이 출토되는 사실도 만주와 한반도 전체가 단군조선 영역이었음을 증명한다. 비파형동검의 출토지는 단군조선과 진국이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었음을 밝히는 증거가 된다. 비파형동검은 우리나라 북부에만 한정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 남부 해안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 지역과 만주 전체 그리고 북경 너머에서까지 출토된다.

    이처럼 문헌과 유물은 동방 조선 전체를 진국辰國이라 칭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현 교과서에는 한반도 북부에 위만정권이 있었다고 하고, 한반도 남부에 진국이 있었다고 하므로, 결국 잘못된 역사가 기술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서쪽 강토 천 리를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땅을 뒤에 도로 찾았다. 그런데 일부 우리 역사학자들은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쫓겨서 한반도로 들어왔고, 그 이후에 기자의 후손 기준과 연나라 추장 위만에 의해 잠시 발전하다가 한 무제의 동방원정 때 평양 왕험성이 1년 만에 점령당하여 한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남부 진국의 소국들을 병합한 백제, 신라, 가야가 나왔는데 그 주체가 단군조선과 북부여의 후예가 아니라 위만조선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한마디로 단군조선의 초기는 신화이고, 말기는 중국계 식민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대한민국 일부 강단사학자들이 중국 사료(『사기』, 『삼국지』, 『한서』)를 근거로 하여 우리 고대사의 뼈대를 세웠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중화사관으로 기록된 사료들을 아무런 비판 없이 추종하기 때문에 일어난 불상사다. 일부 학자들은 또 일제가 임나일본부를 한반도 남부에 넣을 틈바구니를 만들기 위해서 왜곡하여 주장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추종해 왔다.

    이러한 무비판적 추종은, 한반도의 북쪽은 중국 식민지, 남쪽은 일본 식민지로 만드는 틀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이 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학계의 뼈아픈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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