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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

    홍범도 장군에 대한 오해와 진실

    정원식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6월 7일은 100년 전인 항일무장독립투쟁사 최초로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 정예군에 맞서 승리한 기념비적인 날이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만주 북간도에서 독립군 600여 명이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와 남양수비대 1개 중대 500여 명과 싸워 승리한 전투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일본군 전사자 157명, 중상 200여 명, 독립군 전사자 4명, 중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동년 1월 7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무장독립투쟁을 선포한 지 5개월 만에 거둔 승리로서 봉오동 전투를 ‘독립전쟁 1차 대승리’라 규정했다. 이 승리의 주역은 청산리 대첩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던 홍범도 장군이다. 정부는 1962년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 후 홍범도 장군은 우리에게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각인되었으나, 몇몇 사실들이 세간에 잘못 알려져 오해를 낳고 있다.

    첫째는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과 그의 대한독립군이 거둔 대승리’라는 오해다.

    봉오동 전투는 최진동·운산·치흥 3형제가 이끄는 대한군무도독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등 3개 단체가 통합하여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와 ‘대한신민단’ 등이 연합하여 이룬 전과이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과 <일본 외무성의 밀정 보고서>에, 봉오동 전투에서 모든 부분을 총괄한 “총사령관은 통합부대장인 ‘대한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이고 예하 전투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한 사람은 연대장 홍범도”라고 명확히 명시되어 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봉오동 전투의 실제 총지휘 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며, 그 휘하에 홍범도 장군은 연대장으로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전투를 주도한 총지휘관이었다.


    특히 거부였던 최운산 장군은 형 최진동과 함께 개인 사비를 들여 러시아와 체코군단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구매하고 군량은 물론, 최운산 장군의 아내 김성녀 여사가 주도하여 의복을 자체 제작·조달하여 봉오동 대첩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음이 학계에서 이미 밝혀졌다.


    의병투쟁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익힌 전형적인 야전형 지휘관인 홍범도 장군은 탁월한 유격전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봉오동 상촌지대의 산악지형과 지물을 적절히 이용한 매복과 기습전으로 일본 정규군을 괴멸시켰다.

    둘째, 홍 장군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일자무식의 산포수’라는 오해다.

    홍 장군이 일자무식이라는 오명은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 장군의 회고록인 『우둥불』에서 기인한다.


    이범석 장군은 회고록에 본인 소속 부대인 북로군정서와 상관 김좌진 장군, 그리고 자신의 위상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청산리 대첩에서 홍범도 장군의 공적을 고의로 폄하·왜곡하며 일자무식一字無識의 노비·포수 출신이라 기술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 고려인문화센터와 하바로부스크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홍범도 장군이 초서체로 작성한 편지는 일자무식자가 아닌 상당한 지식인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1919년 독립군 대장으로서 반포한 ‘유고문’에서도 상당한 문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1910년 여러 지역 의병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선언서를 내는 일에도 참여하였는데 정말 일자무식이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홍범도 일지』에 의하면 홍 장군은 자유시 참변과 스탈린 집권 후 소련 영내에서 독립군 활동 금지령으로 항일무장독립운동을 못하게 되자, 농업조합을 만들어 한인들의 생활 권익신장에 투신했다. 이때 부패한 러시아 관리들의 가혹한 횡포와 탄압에 맞서 제도권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1927년 10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이처럼 홍 장군의 공산당 가입은 사실이다. 그러나 홍 장군이 사상·신념적으로 경도되어 일신의 영달을 추구한 것은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홍범도 장군의 『환단고기』 발간 지원은 허구다’라는 오해다.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홍 장군은 한민족의 역사 회복과 민족의식 함양을 통해 독립투쟁의 정신 무장을 위해 잃어버린 한민족 9천 년 국통맥과 문화와 역사의 참모습을 밝혀 준 『환단고기』 편찬에 개인 사비를 들여서 적극 지원하였다. 이는 운초 계연수 선생이 직접 쓴 『환단고기』 서문에 “홍범도와 오동진 두 벗이 자금을 대어 목판에 새겨 인쇄하였다(洪範圖 吳東振兩友之出金付諸剞劂)”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여천 홍범도 장군에 대한 오해는 개인의 지나친 공명심과 개인 영웅주의사관, 식민사관의 프레임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특히, 정치·사회적 권위에 굴복하여 검증과 비판 없이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교과서에 기술한 과거 학계와 정부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모든 기록은 철저한 크로스체크와 검증을 거친 이후에만 신뢰성 있는 사료로서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범석 장군의 주장을 그의 권위(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 역임) 때문에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못한 것은 소위 베이컨의 ‘극장의 우상’에 함몰되어 사실로의 접근을 스스로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집단기억에서 실체적 진실이 계속 왜곡되며 부풀려지는 악순환을 낳게 했던 것이다.

    홍 장군의 유해 봉환에 앞서, 우리 국민 모두는 홍범도 장군을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한 역사적 인물로 올바로 복원시켜야 한다. 이것이 홍범도 장군을 우리 국민들이 최고의 예우로 모시고, 진정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최근 북한은 홍범도 장군이 평양 출생이라는 이유로 연고권을 주장하며 한국으로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는 어느 정도 우리 정부도 예상했을 것이다. 작년 4월 22일 홍 장군과 함께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던 계봉우와 황운정 애국지사를 고국으로 봉환해 온 이상,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필자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순조롭게 국내로 봉환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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