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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잊혀진 단체, 단학회檀學會를 아시나요?

    박찬화 대한사랑 기자

    단학회의 항일 무장 항쟁과 역사 수호 활동

    올해는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 계연수 선생 순국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광복 후 75년이 지났지만 독립운동사는 그 일부만 알려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는 수만 명의 독립운동가 중에서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등 20여 명에 불과하다.

    단학회라는 단체가 있다.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홍범도, 김좌진 장군은 단학회의 간부였다. 오동진 장군도 석주 이상룡 선생도 단학회 간부였다. 『환단고기』 편저자 계연수 선생도 2대 단학회 회장이었다. 이들의 독립운동만 보더라도 단학회를 기억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단학회는 1909년 해학 이기 선생을 중심으로 만든 단체다. 단학회 독립운동은 항일 무장 항쟁과 역사 수호 활동이다. 1대 이기 선생부터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며 2대 계연수 선생은 『환단고기』 발간과 더불어 서로군정서에서 공을 세웠다. 3대 최시흥 장군은 천마산대, 광복군총영 등에서 가장 치열한 게릴라 항쟁을 벌였고, 제천혈맹, 십보장 선언에 참여한 단학회원을 포함한 5만여 명의 단학회 계열 독립 운동가들의 항일항쟁이 있었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지키기 위한 활동으로써 2대 단학회 회장 계연수 선생은 단학회 창시자 이기 선생의 숙원이자 꿈인 『환단고기』를 1911년 발간하였다. 단학회의 사상적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홍범도, 오동진의 자금을 받아 이기 선생이 마지막 혼을 다해 감수한 『환단고기』 30권을 1911년 세상에 출간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 초간본을 전해 받은 6대 단학회장 이유립 선생은 해방 후 ‘단단학회’라는 이름으로 역사광복 운동을 벌이며 1979년 마침내 『환단고기』를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게 된다. 단학회의 오랜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기 선생과 단학회의 창립

    이기 선생은 황현, 이정직과 더불어 호남 3걸로 불리는 조선말 실학자이자 항일독립투사로서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무렵 이기 선생은 항일운동을 위해 나철, 오기호, 홍필주와 더불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이등박문 등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였으며 일왕과 이등박문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어 한일 양국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1907년 3월 오기호, 나철 등과 같이 이기 선생은 이완용 등 매국 5적을 주살하기로 결의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하고 체포돼 7년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갔다. 석방된 후에는 서울에서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면서 민중계몽운동에 전념했다.

    대한자강회 활동

    이기 선생은 1906년 윤효정, 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다. <대한자강회 월보 창간호>부터 <10호>까지 24건의 글을 기고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대한자강회 월보> 편집협찬위원으로 장지연, 윤효정, 정운복, 이기, 현은, 양홍묵, 여병현, 남궁훈, 임병환, 박은식 10명을 공선하고, 월보 검열위원으로 윤효정, 장지연, 정운복 3인을 선정했다. 이후 이기 선생은 자강회 회원이던 계연수, 이정보, 김효운 등과 함께 단학회를 조직하였다.


    1909년 3월 16일 단학회 창립 합의, 5월 5일 참성단 고유제

    이기 선생은 단군교 중광식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평소에 나철 선생과 서로 심각하고도 광범위한 토론의 기회를 많이 가졌고 결국에는 삼신설三神說의 정의와 신시개천, 단군건원 등 핵심문제에서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였다. 결국 자강회원 중 계연수, 이연보, 김효운 등 여러 선생들의 간곡한 희망에 의하여 단학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는데 이때가 1909년 3월 16일이었다. 그리고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 고유하기는 그해 5월 5일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두 달이 조금 지난 7월 13일에 이기 선생은 나라를 뺏긴 것에 분개하여 절식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기유(1909)년 대영절과 개천절에 마리산 참성단에서 삼신일체상제의 주벽 아래 환국시조 천제환인, 신시시조 환웅천황, 조선시조 단군왕검을 배향으로 하는 천제의식을 맞추면서 단학회 취지문을 발포하고 1910(경술)년 이후 특히 서북지방을 근거로 하여 점차 비밀리에 회세의 확대발전을 위하여 최대 노력을 기울였다.<커발한, 1968.9.1>

    결론적으로 나철 선생이 주도한 대종교의 독립운동과 더불어서 이기 선생이 창립한 단학회의 독립운동을 이해해야 이후 간도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의 사상적인 맥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학회의 두 차례 제천혈맹과 조선인 십보장

    단학회는 1914년 이후 두 차례의 제천혈맹을 거행했다. 그리고 삼일혁명이 발발한 후에는 조선인 십보장을 발표했다.

    1914년 천마산 제천혈맹

    광무 18년(1914) 갑인 3월 16일에 단해 이관집, 석천 최시흥, 송암 오동진, 백하 김효운, 벽산 이덕수, 일봉 박응백, 창춘 양승우, 직송 이용담, 국은 이태집, 녹수 서청산, 백주 백형규 등 12선인과 더불어 삭주 천마산에서 제천혈맹을 거행했다. 이날 평안북도 천마산 성인당에 모여 삼신의 주벽 하에 삼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면서 단학회의 기본 대책을 토의했다고 전한다.

    1915년(혹은 1918년) 제천혈맹

    1915년 백암 홍범도 장군과 석주 이상룡 선생은 벽산 이덕수의 소개로 참가하였으며 그해 10월 개천절에 박응룡, 정창화, 박용담, 김병주, 이용준, 이봉우, 허기호, 신찬정, 이양보, 주상옥, 이동규, 김석규, 손영린, 이진무 등 14명이 추가로 취지문에 서명하게 되어 회원이 5만여 명에 달했다.

    10월에 만주 관전현 홍석랍자구紅石拉子區 홍석령 산하에 단학회를 이설하고 배달의숙을 열었으며 <단학회보>를 발간하였다.(<커발한 제14호> 1968.9.1) 오동진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자금을 출연하여 관전현에 민족학교 ‘배달의숙’을 설립했다. 그 비용(단학회보)은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 선생이 보조했고 광복군 제1영 사령장 오동진 장군이 교당과 전토를 사서 기증했다. (『대배달민족사』「5권」 40쪽) 이 배달의숙에서 오동진, 계연수, 최시흥 등이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역설하며 조선의 역사를 가르쳤다.

    조선인 십보장(1919년 3월 16일)

    (1919년) 3월 16일 단학회에서는 남만주 관전현 홍석랍자紅石砬子에 1,55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을 낭독하고 조선인의 십보장을 결정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커발한 제15호> 1969.1.1)


    단학회의 제천혈맹과 조선인 십보장 선언 명단을 검토해 보면 이 명단이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다수 평북 삭주 출신이며 그중 이씨는 모두 고성 이씨다. 이들은 천마산대, 광복군총영,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동했으며 활동무대는 평북 삭주와 남만주, 서간도였다. 명단 중에는 이유립 선생 사후에 독립유공 서훈 받은 이가 9명이다. 이런 내용 등을 검토해 볼 때 제천혈맹, 조선인십보장 명단은 실제 참여자들의 명단이며 이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단학회의 조직화 : 간부 명단과 지역 분회 조직

    단학회는 조직화되면서 1대부터 회장, 명예회장, 고문, 간사, 교화사 등의 조직이 갖추어졌다. 단학회 간부 명단은 <커발한 17호, 1970.3.1>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 단학회 간부진 명단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천마산, 삭주지역 그리고 압록강 너머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다. 이 내용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보다는 덜 알려진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 명단의 사실성이나 실재성을 검증해 볼 수 있다. 실제 자료조사를 하고 난 결론은 단학회 간부 임원은 실존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다수였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검증 가능했다.

    단학회, 지역별 조직으로 운영했음이 드러났다.

    단학회의 조직도를 보면 회장을 위시하여 명예회장, 고문, 교화사, 간사 등을 두었으며 지역별로는 분회를 두었다. 분회에도 회장과 총무가 있으며 간사와 교화사까지 둔 곳도 있었다.

    단학회 분회

    ☞구성분회장 박찬계, 총무 배준호 ☞희천분회장 나창헌, 총무 양찬구 ☞의주분회장 독고찬, 총무 이학린 ☞선천분회장 계룡제 ☞창성분회장 신찬정, 총무 김두운, 간사 안선국 ☞삭주분회장 이봉우, 총무 백남규, 간사 주원건・김윤봉 ☞벽동분회장 공정주 ☞철산분회장 박여준 ☞강계분회장 이항봉(1대), 강만년(2대) 총무 김낙주 ☞자성분회장 궁인성 ☞영변분회장 김승문, 총무 김영철 ☞관남분회장 양승우, 총무 고할신, 간사 백형규・김창섭, 교화사 이관실・박용담 ☞관동분회장 김효운, 총무 명창하, 간사 김윤선・이용찬 ☞관서분회장 김상택, 총무 강경모 ☞관북분회장 최석순 ☞대구재청분회장 이양화 ☞궁자청분회장 김서준 ☞삼분자분회장 이윤호 ☞류하분회장 김철 ☞왕청문분회장 양세봉, 총무 이창복, 간사 김활섭・김용봉

    단학회 지역 분회장들의 면면을 보면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가였으며 21명의 지역 분회장 중에서 11명 즉, 반 이상이 이후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을 수여받게 되었다. 그 11명 중 8명이 이유립 선생이 돌아가신 1987년 이후에 독립운동가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찬 독립운동가들이다. 이처럼 단학회 분회장과 간부들의 명단은 활동 지역도 명확하게 합치되며 그 활동 역시 분회장에 어울리는 독립운동임이 드러난다.


    이것은 단학회 분회지역 조직도 속의 명단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며 이를 정리하여 후세에 전한 이유립 선생의 증언이 맞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다. 이런 것을 볼 때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린 이유립 선생의 단학회 활동과 독립운동을 허구와 조작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매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비열한 행태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독립운동 유공자가 된 분들 외에도 단학회 간부들의 활동이 면밀히 검토되어 이유립 선생뿐 아니라 모두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란다.


    독립운동가 오봉록 지사, 단학회의 존재를 증언하다

    천마산대天馬山隊는 1920년 3월경에 최시흥 장군이 조직하였다. 근거지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의 천마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천마별영天摩別營·철마별영鐵馬別營으로도 불렸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최시흥은 의주군 고령삭면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뒤 만주로 넘어가 류하현 삼원보에서 여러 명의 동지와 하얼삔으로 가 그곳의 노농병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이해 12월 압록강을 건너 귀국, 천마산대를 조직하고 1920년 3월부터 활동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독립신문 158호> 1923.3.14)

    천마산대는 3.1운동 이후 1920년대 초까지 국내를 기점으로 한 무장투쟁단체 가운데에 가장 혁혁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단체로 평가되고 있다. 천마산대 출신의 오봉록吳鳳碌(1902∼1981)은 1977년 4월에 천마산대 대원의 이름과 활동을 기록하여 『삭주군지』에 실었다. 이들 66명 중 최시흥 장군과 그의 동생 최시찬에 관한 서술에서 ‘단학회’가 등장한다.

    최시흥: 의주 출신. 후에 삭주 구곡면 신풍리로 이주, 단학회 3대 회장. 3·1 독립선언 직후 박응백 등과 함께 동지를 규합하여 천마산대를 조직, 사령장에 취임. 1924년 12월 평양 감옥에서 옥사했다.

    최시찬: 최시흥 사령장의 아우, 무계급 대원으로 종군하여 단학회의 재정보조에 주력 (오봉록 지사 증언, 『삭주군지』)


    최시흥은 천마산대를 만든, 어떻게 보면 알려져 있는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그의 동생은 무명이다. 이름을 아는 전문가도 없다. 그의 동생이 최시찬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거기에다 ‘최시찬’의 다른 이름이 ‘최오산’이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용의 조선인 명부>를 볼 때 유일하게 알 수 있다.

    최시찬을 최오산으로 알고 ‘최오산’을 공훈 전자 사료관에서 검색해 보면 “박기순, 임성섭, 조성룡, 김중보, 이찬지, 맹희준, 이지선, 이응린, 장기순” 등 26명이 1923년 9월 평북 희천군 북면에서 천마산대의 최오산 일행이 주재소를 소각하고 일경을 처단하는 것을 도왔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었다. 공식적인 재판의 과정이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남아 있다.


    최오산은 다른 독립 운동가와 얽힌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명확히 실존 인물로 드러난다. 최오산(최시찬)과 관련된 사건 연류자 대부분이 2010년 이후에야 공훈을 인정받았음을 볼 때 최오산(최시찬)에 대한 오병록 지사의 증언이 맞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최시찬 선생이 단학회의 재정보조를 했다는 것과 그의 형인 최시형 장군이 단학회 3대 회장이라는 결정적인 증언의 신뢰성을 보여준다. 오봉록 지사는 단학회를 알고 있었다. 천마산대 대장이 3대 회장임을 알고 있었고 동생 최시찬이 단학회를 돕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3대 회장이라는 것은 1, 2대 단학회 회장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를 오 지사도 알았을 것이라는 것은 추정이 가능하다.

    오 지사는 단학회를 구체적으로 증언한 이유립 선생이 천마산대 대원으로 활동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환단고기』 위서론을 주장하는 위서론자들은 이유립 선생이 ‘단학회’라는 가상의 단체를 지어내서 자신이 창립한 ‘단단학회’의 전신으로 만들어 놓았다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오봉록 지사의 단학회 증언을 통해서 ‘단학회’가 실재했던 단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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