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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특강]

    대한의 원형 사관이 사라진 계기

    대한의 상고사를 공부하려 해도 사료가 부족하다. 왜 유구한 대한의 역사에 고서古書가 겨우 고려시대에 집필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뿐인가? 무엇 때문에 대한의 원형 사관에 따라 집필된 고서가 사라지게 되었는가?
    최재목 대한사랑 기자

    대한의 원형 사관과 국통맥은 무엇인가? 지금 강단에서 가르치는 정통 국통맥은 무엇이며, 어떤 왜곡의 과정을 거쳐 잘못 인식되었는가? 광복 70년을 넘어 대한 원형 사관과 국통맥을 되찾는 길은 무엇인가?

    대한 상고사를 연구하는 모든 이들이 호소하는 큰 애로점이 있다. 참고할 만한 이 땅의 고대 사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대표적인 대한의 역사책은 무엇인가? 아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제일 먼저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왜 수천 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나라의 상고사 기록이 두 권뿐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아래의 세 가지 사건으로 대한사관의 원본 역사서들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첫째 고구려, 백제, 신라의 패망 시 저질러진 분서焚書사건이며, 둘째 조선의 소중화小中華사관을 가진 왕들에 의한 고서 수서령 및 서효사 소각사건이며, 셋째 일제의 고서 강탈 및 소각사건이다. 이에 따라 소중화사관과 일제식민사관에 유리한 글들만 뿌리를 부정하는 교과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기년아람』에서 전하는 삼국의 역사서가 사라진 이유

    우리나라 역사서가 송두리째 잿더미가 된 2대 사건이 있었다. 조선 영·정조 시대에 이만운李萬運과 이덕무李德懋라는 선비가 『기년아람紀年兒覽』을 편찬하여 어린 학동뿐만 아니라 서민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이용하였다. 『기년아람』은 후에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도 열람한 뒤 경국지학經國之學, 즉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학문이라 생각하여 『기념편람』이라는 서명을 내려주기도 했다. 여기에 대한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대한사관大韓史觀의 뿌리가 단절된 결정적인 양대 재액이 나온다. 조선의 두 선비는 자신의 뿌리 역사를 알 수 없게 만든 ‘양대 재액’을 무엇이라 칭했는지 원본을 통해 확인해 보자.


    문승국이상문헌지무징問勝國以上文獻之無徵하니 공公이 탄왈嘆曰 전前 왕조 이상은 문헌이 왜 부족한지 물으니, 공이 탄식하며 대답하였다.

    당이적唐李勣이 기평고구려旣平高句麗에 취동방전적어평양聚東方典籍於平壤하고 당 나라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나서 평양에 동방의 전적을 모아 놓고서

    기기문물불양중조忌其文物不讓中朝하야 거이분지擧而焚之하고 그 문물이 중국에 못지 않음을 꺼려서 모두 불사르고,

    신라지말新羅之末에 견훤甄萱이 거완산據完山하야 수치삼국지유서輸置三國之遺書하고 신라 말기에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을 점령하고 삼국三國에서 남긴 책을 실어다 놓았는데,

    급기패야及其敗也에 탕위회신蕩爲灰燼하니 패망에 이르러 잿더미가 되어 깨끗이 없어졌으니,

    차삼천년래이대액야此三千年來二大厄也라 이것이 3천 년 이래 양대 서액書厄입니다.” (『기년아람紀年兒覽』 「서序」)


    조선의 두 선비가 안타까워한 것처럼 대한 상고사의 맥을 담은 삼국의 고서들은 애석하게도 삼국의 망국과 더불어 소실되었다. 우선 양대 대액의 첫째는 당나라 이적李勣 장군이 668년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성과 서적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본문을 보면 이적 장군은 ‘동방전적東方典籍을 모아 놓고 그 문물이 중국에 못지않음을 꺼려서 모두 불살랐다’라고 했다. 핵심 구절은 ‘불양중조不讓中朝 거이분지擧而焚之’ 여덟 글자에 있다.

    그럼 중국 왕조(한·당)에 ‘불양不讓’, 즉 못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당나라 눈으로 볼 때 고구려는 그들의 문화와는 다른 별도의 뿌리 문화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는 광개토태왕비와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을 통해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고구려의 뿌리가 지나支那족이 주장한 한사군의 현도군이 아니라 ‘북부여北夫餘’임을 두 금석문이 전하기 때문이다.

    불태워질 수 없는 두 기록이 전하는 고구려의 뿌리, 북부여

    고구려의 두 가지 불태울 수 없는 기록을 통해 고구려의 뿌리를 찾아가 보자.


    첫째,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비문이다.

    유석시조惟昔始祖 추모왕지창기야鄒牟王之創基也 출자북부여出自北夫餘 천제지자天帝之子 모하백여랑母河伯女郞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창업의 기틀을 다지셨는데, 북부여에서 유래한다. 왕께서는 천상 상제님의 아드님이시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비는 고구려의 뿌리를 ‘부여’가 아니라 ‘북부여’라 전한다. ‘출자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이 다섯 자가 중요하다. 또한 시조 주몽을 ‘천제지자’라 했다. 고구려의 시조를 동방조선의 독자적인 천자관을 가진 성스러운 존재로 기록한 것이다.

    둘째,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이라는 고구려인의 유적이다.

    이 묘지명은 1935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하양어두下羊魚頭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지명은 모두루가 광개토태왕 때 북부여 지역의 관료인 수사守事였다고 전한다. 또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뿌리를 온전히 전해 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핵심 구절 세 가지를 원문을 통해 확인해 보자.

    주몽은 북부여에서 나왔고, 일월의 아들이자 성군이었다.


    하박지손河泊之孫 일월지자日月之子 추모鄒牟 성왕원聖王元 출북부여出北夫餘 천하사방지차국군최天下四方知此國郡最 하박河泊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인 추모鄒牟 성왕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사방이 알지니.

    모두루의 선조는 주몽(추모)을 수행하여 북부여에서 내려왔다.

    성왕노객조선聖王奴客祖先□□□북부여수성왕래北夫餘隨聖王來 노객(奴客:모두루)의 조선祖先이 ... 북부여에서 성왕을 수행하여 (이곳으로) 왔다.

    고구려가 북부여를 복속시킨 후에도 계속해서 북부여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고, 그대로 지역명을 사용했다. 모두루는 광개토태왕의 은혜로 북부여 지역의 수사로 파견되었다.

    국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上大開土地好太聖王 연조부緣祖父□이은교尒恩敎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에 이르러 (모두루의) 조부와의 연으로

    노객모두루奴客牟頭婁□□모교견영북부여수사牟敎遣令北夫餘守事 노객 모두루와 □□모(□□牟)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영북부여수사로 파견하니


    양대 재액의 둘째는 후백제 견훤이 신라와 백제의 역사 서적을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견훤이 불태워버린 고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삼국유사』와 『태백일사』에 따르면 신라 건국의 주체 세력은 단군조선의 유민, 즉 진조선에서 내려온 6촌장과 북부여 왕실의 파소, 박혁거세였고, 백제는 고주몽의 부인인 소서노와 그의 아들 온조왕이다. 그러므로 신라와 백제는 단군조선과 북부여 왕실과 관련된 역사인식을 가졌고,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신라와 백제의 왕실 기록이 사라져 이런 뿌리를 온전히 복원하기 어려워졌다.

    조선의 두 선비가 안타까워한 것처럼, 대한 역사의 전사前史는 두 사건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실제로 단군조선과 북부여를 계승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책이 잿더미로 사라져 버렸으니, 무엇으로 단군조선 이래 전수된 역사 맥을 온전히 전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의 소중화사관을 가진 왕들의 고유사서 폐기 사건

    대한인들이 꼭 알아야 할 사건이 또 있다. 바로 소중화사관을 가진 조선의 왕들에 의해 집행된 수서령收書令과 「서효사誓效詞」 소각 사건이다.

    아시다시피 고려를 계승한 조선은 태생부터 지나支那족의 명明나라를 대국으로 모시고, 주원장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소중화를 칭하였다. 국제정세는 힘의 논리를 앞세우기에 힘없는 조선의 통치자들의 어쩔 수 없는 정치적 한계와 이해득실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왜 자신의 뿌리 역사를 백성들이 모르게 하고, 스스로 불살라야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심에 소중화로 살아가기로 한 태종 이방원의 「서효사」 소각 사건과 그의 후손인 세조, 예종, 성종이 시행한 수서령이 있다.

    첫째, 태종의 「서효사」 소각 사건이다. 결론부터 말해 조선 3대왕 태종太宗 이방원은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보관 중이던 「서효사」를 가져오라고 해서 불태워 버린다.


    「서효사」는 무엇이고, 어떤 내용을 수록했기에 불태워져야만 했는가? 간략히 말해 「서효사」는 ‘맹세할 서誓, 본받을 효效, 말씀 사詞’ 자로 문자적으로는 ‘하늘에 맹세하고 본받는 글’이라는 뜻이다. 단군조선의 사관이던 ‘신지神誌에 의해 기록된 비밀스러운 글’이라는 뜻으로, 일명 「신지비사神誌祕詞」라고도 한다. 그럼 하늘에 고하는 글, 제천문인 「서효사」에 관해 현재 전하는 문헌은 어떤 것이 있는지 원문을 통해 살펴보며 그 진면목을 파악해 보자. 「서효사」는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단군세기』 등에 기록되어 전한다.


    서효사(신지비사) 내용을 전하는 문헌 기록

    『삼국유사』

    자칭성개명금自稱姓盖名金 위지소문位至蘇文 내시중직야乃侍中職也 그(개소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 했으며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니 바로 시중侍中의 벼슬이다.

    당서唐書 운云 개소문盖蘇文 자위막리지自謂莫離支 유중서령猶中書令 『당서』에는 개소문이 자칭 막리지莫離支라 했으니 당나라의 중서령과 같은 것이라 했다.

    우안又按 신지비사서神誌秘詞序 운云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 서병주序幷注 또 「신지비사」의 서문을 보면 ‘소문 대영홍이 서문을 쓰고 주를 달았다’고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제삼卷第三 흥법興法,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일연 스님은 보장왕寶藏王과 (연)개소문蓋蘇文의 대화를 통해 「서효사」의 다른 이름인 ‘신지비사’를 전한다. 다만 그 본문은 전하지 않고,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 서병주序幷注’, 소문 대영홍이 서문을 쓰고 주를 달았다.”라고만 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일연 스님 시절에 분명 「신지비사」라는 문서가 존재했고, 관직명이 소문蘇文인 대영홍大英弘이 서문을 쓰고 주석을 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서효사」 본문의 일부는 세종대왕 시절 편찬된 『고려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중기 숙종 임금 때 김위제金謂磾라는 신하가 『도선비기道詵秘記』와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하여 남경 천도를 건의했다고 한다.


    김위제金謂磾 숙종원년肅宗元年 위위위승동정爲衛尉丞同正 신라말新羅末 유승도선有僧道詵 입당학일행지리지법이환入唐學一行地理之法而還 작비기이전作秘記以傳 김위제는 숙종 원년(1,096)에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이 되었다. 신라 말기에 승려 도선道詵이 당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위제학기술謂磾學其術 상서청천도남경왈上書請遷都南京曰 김위제가 도선의 술법을 공부하여 남경으로 천도하자고 요청하는 상서를 올려 이르기를,

    도선기운道詵記云 고려지지高麗之地 유삼경有三京 송악위중경松嶽爲中京 목멱양위남경木覓壤爲南京 평양위서경平壤爲西京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 땅에는 3경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이 중경이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며, 평양平壤이 서경이다.

    십일십이정이월十一十二正二月 주중경住中京삼사오유월 三四五六月 주남경住南京 칠팔구시월七八九十月 주서경住西京 즉삼십육국조천則三十六國朝天 11월·12월·1월·2월은 중경에 거주하고, 3월·4월·5월·6월은 남경에 거주하며, 7월·8월·9월·10월은 서경에 거주하면 36개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중략)

    우신지비사왈又神誌秘詞曰 여칭추극기如秤錘極器 칭간부소량秤幹扶疎樑 추자오덕지錘者五德地 극기백아강極器百牙岡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에 이르기를, ‘저울추[秤錘]와 저울접시[極器]에 비유하자면 저울대[秤幹]는 부소량扶疎樑이고,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고, 저울판은 백아강百牙岡이다.


    조항칠십국朝降七十國 뇌덕호신賴德護神 정수미精首尾 균평위均平位 흥방보태평興邦保太平 약폐삼유지若廢三諭地 왕업유쇠경王業有衰傾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70개 나라가 항복하여 조공을 바칠 것이며 땅의 덕에 힘입어 신기神氣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하게 하여 수평을 잘 잡을 수만 있다면 나라를 융성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고, 만약 세 곳의 땅을 버린다면 왕업이 쇠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위제는 고려의 수도(중경)인 송악, 서경인 평양과 더불어 남쪽에 남경을 열어 왕이 넉 달씩 순회, 거주하며 국정을 볼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서인 『도선기道詵記』와 「신지비사」를 통해 삼경三京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삼경제도는 석 삼에 서울 경 자로, 수도를 셋을 두고 통치한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려 중기까지 「신지비사」의 핵심인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전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울추와 저울대, 저울판에 해당하는 세 수도가 조화롭게 유지될 때 ‘조항칠십국朝降七十國’, 즉 주변 칠십 국이 조공을 하고, 태평성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명사관김상직命史官金尙直 취충주사고서책이진取忠州史庫書冊以進 … 1412년(명 영락永樂 10년) 사관史官 김상직金尙直에게 명하여 충주忠州 사고史庫의 서적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 ...

    차명왈且命曰 신비집神秘集 무득피열毋得披閱 이별봉이진而別封以進 『신비집神秘集』은 펴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려라.

    상람기집왈上覽其集曰 차서소재此書所載 개괴탄불경지설皆怪誕不經之說 명대언유사눌분지命代言柳思訥焚之 기여하춘추관장지其餘下春秋館藏之 임금이 그 책을 보고 말하기를,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설說이다.” 하고, 대언代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이를 불사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춘추관春秋館에 내려 간직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8월 7일 둘째 기사)

    태종太宗(1367~1422)은 충청도 충주의 사고史庫(역사도서 보관서)에 보관 중이던 많은 도서 중에 왜 『신비집神秘集』만 별도로 올리라 했는가? 그것도 ‘무득피열毋得披閱 이별봉이진而別封以進’(펴보지 말라, 따로 봉하여 올려라)이라고 엄명했을까?

    태종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1335~ 1408)의 다섯째 아들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형제와 신하를 숙청했다. 결국 태종은 1400년부터 18년간 재위했지만 상국으로 모신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왕자의 난으로 아버지의 뜻을 저버려 정통성이 약한 태종은 대국으로 모신 중국에 작은 빌미라도 잡히지 않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이렇듯 태종은 소중화의 정치적인 논리로 「서효사」를 ‘차서소재此書所載 개괴탄불경지설皆怪誕不經之說’이라 평가해 버렸다. 책에 실린 내용이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설說’이라는 것이다. 태종이 읽은 「서효사」의 내용은 한마디로 자신의 대권 장악을 용인한 상국 중국에 불경한 내용이자, 기이하게 현혹시키는 글이라는 것이다. 이런 죄목으로 『신비집』은 진시황의 분서 사건처럼 불태워졌다.

    안타깝게도 대한의 후손들은 진시황의 분서焚書 사건은 알지만 조선시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감행한 분서 사건은 잘 모르고 있다. 결국 ‘괴탄불경지설’이라는 죄목을 붙여 동방 조선의 제천문이자 역사서인 「서효사」가 불태워지고, 대한의 역사정신과 혼도 어둠 속의 한 줌 재가 되어 버렸다.

    둘째, 세조와 그의 아들(예종)과 손자(성종) 때의 수서령이다. 수서령은 세종대왕의 손자인 단종端宗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된 세조世祖 때 시작되었다. 또 세조의 아들 예종睿宗과 손자 성종成宗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수서령은 한마디로 대한사관으로 기록된 고서들을 수거하고, 이를 숨긴 자를 참하겠다는 것이다.


    1457년부터 1470년까지 지속된 수서령은 어떤 도서를 금기시했는지, 어떻게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팔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렸는지 원본을 통해 확인해 보자.


    세조 3년(1457) 5월 26일 / 『조선왕조실록』 세조 7권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유팔도관찰사왈諭八道觀察使曰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이성모智異聖母 하사량훈河沙良訓 표훈삼성밀기, 안함노·원동중 삼성기, 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등文泰山王居仁薛業等 삼인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 일백여권一百餘卷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삼인 기록 수찬기소의 1백 여권과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道詵 한도참기漢都讖記 등문서等文書 동천록, 마슬록, 통천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 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불의장어사처不宜藏於私處 여유장자如有藏者 허영진상許令進上 이자원서책회사以自願書冊回賜 기광유공사급사사其廣諭公私及寺社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스스로 원)하는 서책을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하라.” 하였다.


    예종 1년(1469) 9월 18일 / 『조선왕조실록』 예종 7권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을 수집하게 하다

    전우예조왈傳于禮曹曰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志公記 표훈천사삼성밀기表訓天詞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삼성밀기, 도증기

    지이성모智異聖母 하사랑훈河沙良訓 문태옥거인설업삼인기文泰玉居仁薛業三人記 일백여권一百餘卷 지이성모, 하사량훈, 문태·옥거인·설업 세 사람의 기록 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 급범간천문지뢰음양제서가장자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家藏者 호중록·지화록·명경수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한시월회일京中限十月晦日 정승정원呈承政院 외방근도십일월회일外方近道十一月晦日 서울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에 바치고, 외방에서는 가까운 도는 11월 그믐날까지,

    원도십이월회일遠道十二月晦日 납소거읍納所居邑 먼 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쳐라.

    납자초이계納者超二階 자원수상자급공사천구自願受賞者及公私賤口 상면포오십필賞綿布五十匹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천구(신분이 낮은 자)에게는 면포 50필을 상주며,

    은닉불납자 隱匿不納者 허인진구許人陳告 고자의상항론상告者依上項論賞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하고,

    익자처참匿者處斬 기속유중외其速諭中外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성종 즉위(1470)년 12월 9일 / 『조선왕조실록』 성종 1권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내다

    하서제도관찰사왈下書諸道觀察使曰 전자前者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志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이성모智異聖母 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왕거인설업삼인기文泰王居仁薛業三人記 일백여권一百餘卷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지이성모, 하소량훈, 문태·왕거인·설업 삼인기 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 급범간천문지리음양제서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 무유수멱상송사無遺搜覓上送事 증이하유曾已下諭 호중록, 지화록, 명경수와 무릇 천문·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했으니,

    상향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구책以上九冊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 도선참기道詵讖記 의전유상송依前諭上送 여서물갱수납餘書勿更收納 기이수자환급其已收者還給 상항 명경수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 도선참기는 전일의 하유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소중화 사관을 가진 세조, 예종, 성종 3대의 조선 중기 왕들은 대한의 원형사관으로 기록된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등을 수거하라고 명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익자처참匿者處斬’ 즉, 숨기는 자는 참형에 처하라는 것이다. 소중화 사관에 반하는 고서, 대한인의 사관으로 기록된 고서를 간직한 자는 목을 친다고 전국에 공표한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의 소중화 사관, 정치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고대 사서들은 전부 왕실로 바치고, 사가에는 보관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일제가 소각한 대한의 고서들

    조선 왕들의 수서령을 피해 겨우 숨어 있던 대한의 고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는 조선을 통째로 삼켜버리고 한민족의 혼을 완전히 거세하고, 영원히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온갖 만행을 일삼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서 20여 만 권을 압수해서 불태워 버린 사건이다. 진시황의 분서焚書보다 더한 불바람이 동방 한반도에서 일제의 총칼 앞에서 이뤄진 것이다.

    1985년 조선일보는 “일제 한민족혼 말살, 새 사실 밝혀져”라는 기사를 통해 이를 고발했다. 이런 사실은 1910년 11월 19일 발간된 「조선총독부 관보 제69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명치 43년(1910년)이라고 당당히 명기한 일제 기록물에는 그들이 금기시하고 제거하려 한 대한제국의 역사서들이 등장한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명의 고지를 통해 자신들이 만든 식민지 통치 법률에 의거해 대한제국의 역사책과 활판을 압수했다. 도서들 중 일 순위는 당시 학교에서 가르치던 대한의 역사 교과서였다. 조선총독부는 ‘건전한 질서와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도서’라는 구실을 붙여 『초등 대한역사』, 『보통교과 동국역사』, 『신정 동국역사』, 『대동역사략』 등을 수거했다.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사가私家에 숨겨져 있던 대한의 상고사 서적들은 악독한 일제 앞잡이들의 눈총에 더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나라 잃은 민족의 울분과 비통을 삼키며 독립을 위해 몰래 공부하던 도서들은 전국 각지에서 강탈되었다. 이때 한반도 안의 소중화사관을 피해 그나마 남아 있던 낭가郞家 서적들은 대부분 불태워지거나 강탈되어 일본으로 사라졌다. 다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동한 독립군들이 고서를 숨겼고, 그 맥이 겨우 이어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11년에 간행된 『환단고기』이다.


    일제가 금서禁書로 지정한 도서목록

    1. 初等大韓歷史(國文, 漢文) 초등 대한역사/ 정인호 편집 장세기 교열 / 1908년 발간 / 단군에서 조선까지 간략하게 기술한 개설서. 배일, 애국사상 고취

    2. 普通敎科東國歷史(보통교과 동국역사) / 현채玄采 지음 / 대한제국 학부에서 1899년에 펴낸 중학교 교과서로 8권 3책으로 되어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부터 기술

    3. 新訂東國歷史(신정 동국역사) / 유근(1861~ 1921)·원영의元泳義 1906년에 지은 역사책

    4. 大東歷史略(대동역사략) / 국민교육회 / 대한제국의 교과서. 1906년 간행 / 단군조선, 기자조선, 마한, 신라 등의 역사를 소략하게 기술

    5. 大韓新地誌(대한신지지) /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의 그 장지연) / 1906년 지리교과서로 만듦 / 우리나라의 자연지리와 풍속, 물산 등 인문지리를 다룸

    6. 大韓地誌(대한지지) / 현채玄采 / 1899년 교과서로 편찬 / 총론과 13도편으로 대한전도와 각도의 지도를 붙인 뒤 각 지역을 설명

    7. 最新高等大韓地誌(최신 고등 대한지지) / 정인호鄭寅琥 / 1909년 교과서로 편찬 /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 (이하 중략)



    그럼 일제가 ‘판매 및 유포 금지시키고, 활판까지 압수 수거하라’고 명한 책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우리역사넷’을 통해 대한제국의 교과서 2종의 내용을 참고해 보자.

    『초등 대한역사』 (1908년 7월 출간 교과서)

    제1편 상고上古 제1장 단군 조선檀君朝鮮 제1절 단군이 탄생하다

    동방에는 처음 무리의 왕이 없어서 백성이 풀로 옷을 해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여름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에는 동굴에서 지냈다. 환인桓因이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아들 환웅桓雄을 낳고, 환웅이 태백산太白山【지금의 영변寧邊 묘향산妙香山】 박달나무[檀木] 아래에 집을 짓고 왕검王儉을 낳았다.

    제2절 단군이 나라를 세우다

    왕검王儉이 성스러운 덕[聖德]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가 단군檀君이 되었다.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가장 먼저 아침 해를 받아 빛난다는 까닭에 조선이라 하였다.】이라고 하니 원년元年은 당唐【지나支那】 요堯임금 25년이고, 융희隆熙 원년(1907)으로부터 4240년 전이다. 비로소 백성을 교화하여 머리를 묶어 덮었으며 왕과 신하, 남녀의 음식과 거처의 제도를 처음 갖추었다.

    제3절 단군이 도읍을 정하다

    태자太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 보내 하夏【지나支那】 우씨禹氏의 만국회萬國會에 참석하도록 하고, 왕자 3명을 강화江華 전등산傳燈山으로 보내 삼랑성三郞城을 쌓았다. 처음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가 이후에 백악白岳【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으로 옮겼다. 팽오彭吳에게 명령하여 국내 산천에 제사를 올릴 때에 동쪽은 대해大海【지금의 태평양】를 한계로 하고, 서쪽은 요하遼河【지금의 지나支那 성경성盛京省】에 이르렀고, 남쪽은 조령鳥嶺【지금의 문경군聞慶郡】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흑룡강黑龍江【지금의 지나支那 흑룡강성黑龍江省 북측】에 닿았다.

    『보통교과 동국역사』(1899년 발간 교과서)

    『동국역사』는 김택영이 저술한 중등용 교과서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을 역사가 현채玄采(1856~1925)가 1899년 초등과정에 알맞게 국한문으로 풀어 쓴 국사교육용 교재이다.


    단군 조선기檀君朝鮮記

    동방에 초기에는 군장君長이 없어서 백성이 풀로 옷을 해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여름에는 나무 위에 살고 겨울에는 동굴에서 지냈다.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지금의 영변부寧邊府 묘향산妙香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는데 성스러운 덕[聖德]이 있었으므로 백성이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부르기를 단군이라고 하였다. 이때가 당요唐堯 25년(서기전 2333년) 무진戊辰이고 우리 대한의 개국 기원전 3734년이다. 역대 문헌에 증빙할 근거가 없어서 고찰할 수가 없다.

    하나같이 단군왕검의 실재와 부루 태자의 도산塗山회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일제는 단군檀君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책을 수거하고, 이후 일제가 원하는 조선의 역사책을 만들어 학교에서 가르쳤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비록 소중화사관을 가졌지만 단군의 실재를 전했다. 그러나 일제는 단군을 신화로 둔갑시켰고, 동방 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축소시키며 지나족의 식민지를 부각시켰다. 한마디로 일제는 한반도 북쪽 위만조선과 한사군, 한반도 남쪽 임나일본부설을 집어넣은 교과서가 필요할 뿐이었다.

    〇 일제 강점기 교과서 우선 목차를 통해 일제가 집필한 교과서의 틀을 살펴보자.


    일제가 만든 역사 교과서의 목차를 보면 그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일제가 만든 교과서 목차를 보면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대한인의 역사 강역을 조선반도로 한정해 기술했다. 대목차가 ‘상고시대의 조선반도’다. 일제는 한민족의 강역은 조선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각인시키고 있다.

    둘째, 북부조선과 남부조선으로 나누고, 일본부 1, 2단락을 강조해 고대 일본과 한국의 교류를 중점으로 기술했다.

    셋째, 조선시대의 무능을 강조하고, 통감부 설치와 일한병합과 총독정치가 은총이라고 마무리했다.

    일제는 상고시대 조선반도로 규정된 한국인의 영토를 둘로 나누었다. 한반도 북쪽은 소목차에서 보는 것처럼 중국의 식민지(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로 설명했다. 그리고 남쪽은 미개한 한韓 종족이 살다가 그 후 가야지역에 일본부가 설치되어 개화되고, 백제와 신라는 일본에 의지해 유지됨을 강조했다. 조선 상고사는 식민지로 시작해, 근대 일본에 의해 다시 식민지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능한 조선의 정치와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에 어려움을 겪던 조선의 백성들을 일본이 구해 주고, 비로소 조선반도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제의 조선병합은 고토회복이요, 은총이라는 것이다. 제 눈에 안경으로 멋대로 쓴 일제 교과서는 조선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칼을 찬 일본인 교사들은 철저한 정치목적을 가진 조선총독부 문부성 교과서로 무섭게 교육시켰다. 그때의 우리 선조들의 조선사 시간은 ‘잘못된 역사관을 머리에 주입받는 고통의 시간’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럼 학생들은 몰랐던 교수용 책자를 통해 일본의 속내를 간파해 보자.

    교수요지敎授要旨 본 과課에서 조선반도의 연혁은 북부와 남부가 크게 다르다. 북부는 예로부터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통치했으며, 따라서 중국의 속국屬國 또는 영토였다는 사실을, 남부는 곧 조선인의 조상인 한족韓族의 거주지로서, 이 지방은 일찍부터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1) 한반도 북부는 ‘중국 식민지’

    기자조선 옛날에 반도의 북부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며, 중국에서 기자箕子가 와서 그 땅에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위만조선 그 후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이 지방에 와서, 기자의 후계자인 준準을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았다.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시기에,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한사군 이로부터 수백 년 동안 반도의 대부분은 중국의 영지領地가 되었다. 한漢이라는 것은 그때의 중국 국명國名으로서, 무제가 조선을 취한 것은 우리의 가이쿠와(開化) 천황【제9대】 때이다.

    2) 한반도 남부는 ‘일본 식민지’

    한종족 반도의 남부에는 한족韓族이 살고 있었는데,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卞韓을 다스리는 세 종족으로 나뉜다. 모두 수많은 소국들로 이루어졌지만, 후에 마한은 백제국이 되었고, 진한은 신라국이 되었으며, 변한은 가라加羅 등의 나라들로 되었다. 가라 등의 나라들을 가리켜 하나로 임나제국任那諸國이라고 이른다. 이상의 나라들은 모두 일본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바다를 건너 일찍부터 서로 교류했다.

    교수요지敎授要旨 본과에서는 일본부日本府를 중심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이 균형을 이루어 정립鼎立하고 있던 시대의 상황을 가르치며, 북쪽에서 일어난 고구려에 맞서, 한족韓族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힘으로 그 국가를 보전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일본과 삼국의 관계 진구[신공神功] 황후는 신라를 정복하신 다음, 일본부日本府를 임나에 설치하고, 삼한의 영토를 다스리셨다. 이 때문에 신라, 고구려, 백제는 모두 일본에 조공을 바쳤으며, 또한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일본에 볼모를 두어 그 진심을 나타냈다.

    광개토왕 닌토쿠 천황 무렵에,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제19대)이 왕성하게 국토를 확장했으며, 백제와 전쟁을 벌였다.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제20대)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백제를 공격하여, 그 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왕을 붙잡아 참수했으며, 고구려의 영토를 남쪽으로 크게 넓혔다. 이 때문에 백제와 신라는 모두 두려워하여, 힘을 합쳐 고구려를 방어했다. 이때 이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다행히 고구려에 멸망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힘 때문이었다.

    일제는 한반도 남부에 소국들이 우글우글하다가 겨우 백제국, 신라국, 가라국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기술했다. 그리고 ‘가라 = 임나제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일본서기』와 『환단고기』는 ‘임나는 대마도다’라고 전한다. 그런데도 일제는 가라 = 임나라는 논리 비약을 통해 역사 사실을 능구렁이처럼 왜곡·날조하였다. 그리고 삼국의 역사를 기술하며 그들이 원하는 카드인 진구왕후를 등장시켜 임나일본부를 집어넣었다. 이를 통해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흥망도 전부 진구왕후가 세운 일본부, 일본의 힘 때문이라 기술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는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왜곡·날조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보 외에 대한제국에 머물며 취재하던 나다니엘 페퍼라는 서양인의 기록을 통해서도 일제가 얼마나 철저하게 대한의 역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워버렸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한국의 역사는 절대로 엄금이다.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일본인은 즉시 한국의 국사란 국사는 전부 압수하여 불태워버렸다. (중략) 한국의 문화를 한 자 한 획이라도 기록한 문자는 철저히 수색하여 폐기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런 문자는 가지고만 있어도 그 소유자는 감옥에 수감됨을 면치 못하였다. (중략) 한국 국사는 가지고만 있어도 범죄가 된다. 나도 달포 전에 자기 조국의 역사를 본 죄로 구타를 당한 후 15일 이상 30일 이하의 구류를 당한 한국인을 목격하였다.”(『독립운동의 진상』 「국사박멸」, 나다니엘 페퍼, 1890~1964)

    일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남긴 채 원형문화를 간직한 책들을 불 속에 던져버렸다. 최종적으로 고대사에 관한 도서 중 일제는 두 권의 책을 남겼다. 『삼국유사』는 단군신화로 몰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덧붙여 놓았으니 폐기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소중화사관을 가진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는 고구려를 비하하고, 신라 중심 사관으로 삼국의 역사를 전할 뿐이니 크게 문제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는 우리의 역사를 단군신화, 기자와 위만 등의 중국 식민지 이후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로 규정짓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보다 짧은 역사, 자주적인 역사관을 갖추지 못한 못난 조선인으로 낙인찍어 영원히 지배하려 하였다. 이것이 조선총독부가 정리한 대한의 국통 맥이 되었고, 이를 배운 이병도 등이 현 교과서의 원형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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