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k- route를 가다] “고인돌 루트(dolmen Route)”의 실체 7(일본편 2)
K-history 기획연재 단군조선의 후예 일본 시원 역사를 열다 2 큐슈(九州) 상륙기
세계고인돌연구학회 (World Dolmen Reserch Academy) 창립
이매림 (사) 대한사랑 수석본부장 / 미래로 가는 바른역사협의회 사무총장
단군조선의 후예 일본 시원 역사를 열다 2 큐슈(九州) 상륙기
구주(九州.큐슈)는 일본의 초기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 곳을 거쳐 일본 전 열도로 문명이 전해진다. 한국과 일본역사와의 연계성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이 지역의 역사 조사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현 일본열도의 문화는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를 통해서 유입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지금이야 배타고 마음대로 넓은 바다를 휘젓고 다닐 순 있지만 고대는 어떠했을까를 정확히 인식해야 고대 문화이동 루트를 알 수 있다. 고대의 문화이동 루트는 선박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코스였다. 그렇지만 망망대해로 배를 몰아가는 게 아니라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방식이다. 그래야 여러 가지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육지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빠른 통로인 것이다.
일본 초기 역사를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꼈는지 중국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중국문화가 유입된 것으로 표시해 놓은 자료가 많다. 고대는 그런 방식의 선박이동로는 거의 없다. 대부분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기에 중국대륙에서 일본열도로 선박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발해만으로 해서 한반도 남쪽으로 쭉 따라 내려오는 방식이다. 한국의 삼국시대도 이러한 방식으로 중국으로 이동했다. 당나라 다녀오던 김춘추가 고구려군에게 붙잡힌 이유가 이런 고대 선박이동로 때문이다.
앞 편에서 우리는 한반도에서 대마도, 이끼 섬을 거쳐 큐슈로 이동하면서 선조들의 이동로를 찾았다. 대마도는 발굴된 유적 유물이 보여준 것처럼 단군조선 시기에 이미 일본 열도로 개척과 문화전파의 첫 전방기지 역할을 하였다.
대마도와 이끼 섬을 거쳐 우리 선조들이 열도에 발을 디디고 본격적인 역사를 열기 시작하였는데 이 지역이 바로 구주(九州)라고 부르는 큐슈 지역이다. 혼슈, 시코쿠, 홋카이도와 함께 일본 열도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일본에서는 고인돌을 지석묘(支石墓)라고 부른다. 지석이란 용어의 출처는 일본이 아니라 조선시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明日將向金馬郡 求所謂支石者觀之 支石者 俗傳古聖人所支 果有奇逆之異常者 (東國李相國集 券 23)에 등장하는 용어다. 1934년 손진태가 학술 용어로 사용하였다.
고인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반고(班固, 8-92) 의 ‘후한서’에 등장하는데 바로 동이족 문화권인 산동성 태산에 있는 고인돌 기록이다.
“한(漢) 소제 원봉(元鳳) 3년(B.C.78년) 정월에 태산(산동성 태안현 북오리)의 내무산 남쪽(산동성 내무현)에 수 천 명이 ‘슁슁’하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대석(덮개돌)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높이가 5장이요, 크기가 48보이고, 깊이가 8척으로 대석의 밑에는 3개의 돌이 받치고 있는데, 이 대석 주변에 수 천의 백조가 모이고 있다. 孝昭元鳳三年正月, 泰山萊蕪山南, 匈匈有數千人聲, 民視之, 有大石自立, 高丈五尺, 大四十八圍, 入地深八尺, 三石爲足, 石立處, 有白鳥數千集其旁.”(후한서 권27, 오행지)
일본의 역사시대는 죠몬시대를 거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일명 야요이시대(弥生時代.미생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너무 이상한 점이 눈에 띄게 검색된다. 야요이시대를 가야문화권에 결부시키고자하는 점이 강하다는 것이다. 물론 가야문화가 일본초기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발굴되는 유물은 가야시대 유물이 아니다. 특히 지석묘를 야요이 문화와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강한데 과연 고인돌이 가야 문화유적일까? 야요이 문화에서 발굴된 청동기, 토기 유물은 가야의 유물과는 차이가 크다. 아래 유물 사진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제 여러분은 큐슈 지역의 고인돌과 유물을 통해 한일 고대사학자들이 말하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일본 열도의 전 역사를 다루면 좋겠으나 주제어 고인돌과 관련된 역사유적만 언급하고 아쉽지만 일본 편을 접고자 한다.)
큐슈는 후쿠오카현, 사가현, 나가사키현, 쿠마모토현, 오이타 현, 미야자키현, 카고시마현 7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큐슈의 위치(출처 : PHOTO ESSAY/ GOOGLE)
일본의 지석묘는 큐슈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한반도 남부의 남방식 고인돌이 큐슈로 유입된 것으로 판단한다. 도래인의 문화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야인들이 그 이전 단군조선시기에 유행하던 고인돌과 청동기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이상하고 맞지 않는 논리다.
△지석묘 이동로와 분포도(출처:日本古代史つれづれブログ)
지석묘의 주인공들이 대마도를 거쳐 이끼섬을 지나 일본 열도 큐슈지역으로 이동해 들어와 발을 내디딘 곳이 현 사가현 (佐賀県 唐津市)과 복강현(후쿠오카 福岡県 糸島市)이다.
일본에서는 큐슈 지방에 이도국(伊都國)과 야마다이국(邪馬台國)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동일한 국가로 보는 학자도 있고 다른 국가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로 꼽히는 '야마다이국(邪馬台国)'의 개국시조로 전해지는 히미코(卑弥呼)라는 여성은 가야 왕실에서 건너간 여성으로 대가야 건국사에 나오는 ‘정견모주(正見母主)’ 라고도 이야기 되고 있다.
△이도국 伊都國 위치 비정( 사진출처: 월간조선 뉴스 룸)
고대 국가위치 비정은 어려운 부분이니 우리는 고인돌과 결부된 유적을 보면서 과거 역사를 살펴보자.
△ 후쿠오카( 福岡県) 지석묘 사진
복강현(福岡県 호쿠오카)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고인돌군이다. 일본에서는 이도국의 역사영역으로 소개하고 있다.
△나가사키현 (長崎県)의 고인돌
나가사키 고인돌 유적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곳이다.
△사가시의 고인돌 유적지 모습이다.
△이토시마시 고인돌군 모습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이토시마시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주류사학계는 북방식 고인돌은 한반도 북부지역만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로 고조선의 영역유물로 주장하고 남방식 고인돌은 고조선 유물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2020년 검정교과서에도 그렇게 표기했다. 일본도 그렇게 같이 주장해 온 것도 사실이다.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 분포도(출처: zum 학습백과) △한반도 지석묘 분포도(일본)
과연 그들이 주장한 대로 북방식 고인돌은 한반도의 북부에만 존재하고 있는가? 우리는 고인돌 루트를 통해 고대 동이족들이 중국대륙에 남겨놓은 북방식 고인돌을 살펴보았고 한반도 남쪽에 멋진 북방식 고인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일본은 어떨까? 한국이나 일본이나 그들은 왜 단군조선이나 고조선 축소논리로 고인돌을 활용하고 있을까?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발견한 일본 북방식 고인돌과 필자가 제시하는 고인돌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에서 사가현에서 북방식 고인돌을 발견하여 언론에 보도한 자료이다. 오른쪽은 필자가 대형북방식 고인돌로 의심하는 고인돌이다. 독자 분들이 파악해 보시라.
이제 충격적인 야요이 문화 실체를 볼 수 있는 유적지 발굴 유물 사진을 보자.
일본 열도 고인돌 사진과 야요이 유적지 사진만 보면 일본 역사 출발점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면 된다.
△야요이 유적지( 가라쓰시宇木汲田遺跡) 발굴 기사내용
가라쓰시 유적은 큐슈 사가현(佐賀県) 유적지이다. 이 곳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 충격적인 것이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청동기 시대의 나노 기술문화의 유물이다.
한국에서 국보 141호로 지정된 청동거울인 다뉴세문경은 단군조선문화의 제천(祭天)용 거울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얼굴 보는 용도의 거울로 제작한 청동경 이전의 유물이다. 현대에도 완전한 재현기술을 찾지 못하는 유물이다. 중국의 고대 청동기 박물관에는 세밀한 청동기 제작에 사용한 흙 점토 거푸집이 많이 전시 되어 있다. 다뉴세문경도 흙 거푸집이 활용되었을 것인데 아직까지 재현법을 찾지 못하였다. 최근 무형문화재 주성장 경기47호 이완규씨의 오랜 연구 속에 활석을 이용한 재현법이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국보 제 141호 다뉴세문경 (多鈕細紋鏡). 제천(祭天)용
가라쓰시(宇木汲田)遺跡에서도 대마도에서 발굴된 단군조선 세형동검이 여러 자루 발굴되었다.
△ 일본 출토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
지금까지 다뉴세문경은 일본 큐슈에서 동경(東京)까지 여러 개가 발굴되었다.
아래는 사가현 야요이시대 발굴유물이다 . 이제 한 눈에 유물이 쏙 들어 올 것이다.
△사가현 야요이시대 발굴유물
입을 다물게 한다. 그냥 단군조선 100% 청동기이다. 더 이상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왜 국내와 일본에서는 이 유물이 고조선 유물임을 확실하게 이야기 하지 않는가?
그럼 복강시(福岡市)의 야요이 유적지 유물도 한 번 살펴보자.
완전 단군조선 유물 천지다. 다뉴세문경과 단군조선 고유의 청동기 형태인 세형동검, 동모(銅矛)·동과(銅戈)도 발굴되었다. 고분군의 형태는 일본열도에 맞는 단순한 형태의 고분이지만 유적은 고조선의 청동기 유적이다. 이 유물을 가야유물로 연결시키기는 너무 완전한 차이가 너무 난다.
많은 자료를 소개드리면 좋겠지만 지면은 한정되어 있어 큐슈에서 좀 떨어진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이즈모(出雲) 청동기 유적을 소개한다.
△이즈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청동검
위 박물관 유물사진 보시면 앞에서 많이 놀라 이젠 놀라지도 않을 것 같다. 이즈모 지역에서 발굴된 358자루 단군조선 후기 세형동검이다. 세형동검이 쌓여있는 형식으로 발굴되었다. 한국 국립 박물관에서는 세형동검 2-3자루 정도 전시해 놓고 있는데 이즈모 박물관에는 아예 세형동검으로 도배를 해 놓았다. 이것이 일본 야요이 문화의 실체다.
한국과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의 비밀을 오늘 여러분들은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젠 “국뽕, 환빠, 유사사학, 영토주의”라고 거품 물고 달려드는 자가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유물을 보고도 역사적 사실을 거부하며 유사사학을 입에 올린다면 그는 틀림없는 “역사의 반역자”다.
더 층격적 증거 자료를 보여 달라면 마지막으로 진짜 하나 더 공개하고 일본 편을 마칠까 한다.
바로 일본에서 발굴된 “단군조선 전형적 청동검인 비파형 동검”이다. 아직 국내에 공식적으로 공개가 안 되었을 것이다. 손잡이 가 여러 개로 분리되는 초기 조립식에서 발전된 손잡이 모듬형 비파형동검이다. 일본에서는 ‘촉각식(触角式)동검’이라고 용어를 정립했다. 그런데 이 동검을 일본대학과 학자들은 “중국식”동검으로 소개하고 있다. 오호라 단군조선 청동검인 “비파형동검을 요령식 동검, 세형동검을 조선식 동검“이라고 분류한 이유가 여기 있구나!
△ 야요이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검을 중국식으로 소개
이건 학자적 양심불량이다. 중원에서는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학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중국식 동검이라니...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한국 사학계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시절부터 한국사에는 만주, 한반도 북부지역에서만 주로 출토된 비파형동검을 요령식으로 이름 붙여 고조선영역을 한강이북으로 축소시키려 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조선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 위만조선을 인정한 고조선을 말한다. 고인돌도 북방식, 남방식으로 분류하여 같은 목적에 활용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비파형 동검은 주류사학자들이 미쳐버릴 정도로 요동과 한반도 남부에서 계속 발굴되어 나왔다. 북쪽에만 있다고 주장했던 북방식 고인돌도 남부지역에서 계속 발견되었고 일본 열도에서까지 발견되었다. 이젠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딱 한 장뿐이었다.
그동안 고조선의 표지 유물이었던 “비파형동검”과 연계 유적인 “고인돌”을 과감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요동 쪽에 비파형동검이 쏟아져 나오니 단군신화를 주장하던 모교수는 당황해서 “ 요동지역에서 비파형동검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동호인지 산융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SF 소설을 발표했다. 동호든 산융이든 고조선 사람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과 그들이 당시 명품바람으로 비파형동검을 사재기 했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또 어떤 모교수는 “ 청동단검이나 지석묘 같은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문화를 통해 민족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자기 저서에 밝히며 앞으로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을 가지고 동이족이나 한민족을 언급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전 포고를 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단군을 가르치는 대학의 역사교수이다. 스승은 고조선 연구에 평생을 다 바쳐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단군신화를 실제 역사로 밝힌 분이다. 스승이 학문적으로 지나쳐서 자기가 바로 잡겠다는 소신도 저서에 남겼다.
대한민국에 더 이상 이런 학자는 없었으면 하는 국민 한 사람으로서 바램이다. 조선총독부보다 더 조선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한국사를 가르치면 되겠는가?
원고분량이 초과했다. 그렇다고 또 내용을 나누어 글을 쓰자니 울화가 치밀어 안 될 것 같다.
오늘 여러분들은 초기 열도를 개척하기 위해 이동한 고대 선조들이 남겨놓은 고인돌과 유물의 실체를 똑똑히 확인했다. 더 이상 없다. 이 내용이면 일본건국사의 모든 실체를 확인한 것이다.
앞으로 아시아를 넘어 지구촌 반대편 국가에 옛 선조들의 형제들이 남겨 놓은 고인돌을 여러분들은 볼 것이다. K-HISTORY는 고대 한 형제권 문화 역사 자취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늘 일본 편을 통해 문명 우위로서 일본의 역사를 하수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열었던 역사라는 입장으로 일본과 일본인을 우리와 하나의 문화권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대한의 역사관을 여러분들이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본 편을 접는다.
오래 전 일본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를 다 돌아보고 그 감동을 한국인들에게 알린 사업가가 계셨다.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 컬러 TV를 생산한 아남산업의 창업자 ‘김향수’ 회장이다.
2003년 작고 하셨는데 그 분은 아래 한 마디로 일본역사를 정의하셨다. 필자도 100% 동의한다. 고인돌 루트를 소개하는 글이기에 일본에 있는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유적유물을 자세히 소개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은 한국이더라”
(아남산업 김향수 회장님 글)
일본 고인돌 루트를 통해 한일고대사의 관계가 다시 정립되고 바른 사학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기를 염원하며 일본 편을 마무리 짓고 이제 전 세계로 고인돌 루트로 달려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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