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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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언론의 선봉장, <대한매일신보>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에게 사살되어 생을 마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매일신보>의 위력을 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
                       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매일신보 ⓒ배설선생기념사업회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에서 창간되어 1905년 을사늑
                     약을 전후한 일본의 침략 야욕에 정면으로 맞서 붓으로 포문을 열어 민족사상

                     을 고취시켰다. 충정공 민영환을 찬양하고, 매국노 송병준을 욕하는 등 과감하
                     게 행동해 나갔다. 영국인 베델은 이 신문의 사장이었고, 이름만으로도 위대한
                     양기탁(梁起鐸)·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안창호(安昌浩)·장지연(張志淵) 등이 필진이

                     었다. 시대의 대문호이자 사상가들이었던 이들은 이곳에 모여, 일본 제국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며, 자신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넓게 펼칠 수 있었다. 신문은 필

                     진에 의해 대한인들의 가슴에 애국심을 일깨웠으며, 필진은 신문에 의해 지금도
                     기억되는 시대의 애국자로 커 나갔다고 하겠다. <대한매일신보>와 대한인들 사

                     이에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커다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발행 부수가 당
                     시로서는 경이로운 17,000부에 이르는 최대 신문사가 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게 국권이 피탈 당한 1910년 경술년 국치일까지, 일본 제국에 침략행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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