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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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탁의 무죄가 선언되어 실패했다. 그러나 일제는 무자비하게 압력을 가하여 두
사람을 <대한매일신보>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순국과 남은 사람들
결국 재판 후유증으로 심장병을 앓은 베델은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
이로 순절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조의금을 광고로 걷었는데, 큰 호응이 있
었으며, 190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교민 단체인 국민회의 기관지로 창간한 <신
한민보(新韓民報)>135호(1909.6.2.)에는 논설로 그의 부음을 전하고, 사진을 곁들여
그를 깊이 애도하였다. 그의 동지 양기탁은 망국 후 임시정부 주석 등을 역임하
다가 중국에서 사망했고,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베델은 심장비대증으로 죽으면서, 양기탁의 손을 잡고서 “나는 죽을지라도 신
보(申報)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시오”라고 유언하였다. 서거 후,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베델보다 한 살 어렸으며, 개인재산을 털어 신문사 운
영을 도왔던 부인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은 “나는 결단코 망부(亡夫)의 사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1907) ⓒ배설선생기념사업회 손자 토머스 군이 배설의 관에 덮었던 태극기를 펼쳐들고
있다 ⓒ배설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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