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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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1.3~1909.5.1)은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출신의 언론인이다. 한국명 "배설(裵說)"
                     은 고종 황제가 부여해 주었고, 고종은 배설의 활동에 필요한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배설은 16살부터 32살까지 16년간은 일본에서 살면서 무역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자격으로 대한제

                     국에 왔다. 베델은 이때 많은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즉, 일본의 침략 마수
                     에 의분을 느낀 베델은 이에 맞서 싸울 수단은 언론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 제국의 침략을 보도하던 베델은 일본에 우호적인 <런던 데일리 크로니
                     클>의 논지와는 맞지 않아서 사직하였다. 그는 자신이 번 돈과 부인의 사재, 그

                     리고 통신원 월급을 통틀어 1904년 7월 18일 대한제국인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하였다. 1905년에는 <코리아 데
                     일리 뉴스>의 국한문판 또한 발행하였다. 일본제국인 검열관의 사전 검열을 피

                     하고자, 영국인 베델의 명의로 발행하였다.



                     세 번의 탄압, 사장직에서 물러나다
                       영국인 국적 때문에 일본의 검열을 피하여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던

                     이 항일 애국자를 일본은 간과할 수가 없었다. 일본은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
                     기 시작했다.

                       베델의 추방 운동에 실패한 일제통감부는 영국에 압력을 가하여 신문의 일부
                     논지를 국제적으로 문제 삼아 두 차례나 영사 재판에 걸었다. 베델은 1907년 10
                     월과 이듬해 6월, 두 차례나 재판정에 서야 했다. 1908년 경성의 영국 총영사관

                     에 설치된 법정에서 열린 두 번째 재판에서 영국인 판사는 베델에게 3주간 금고
                     에, 만기 후 6개월간 선행 보증금으로 피고인으로서 1000달러, 보증인으로서

                     1000달러를 즉시 납부하라고 판결했다. 베델은 상하이에 호송되어 3주간 금고
                     생활을 마치고 1908년 7월 서울로 돌아왔다.

                       사태의 심각함을 절감한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사장직을 자기 비서에게 맡
                     기고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세 번째 탄압 수단은 악랄했다.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을 국채 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탄압하려 하였으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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