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3 - 대한사랑 14호(202502)
P. 53
2025. 2
업을 계속하리다”라고 약속했지만, 석 달 후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신문은
일본의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되고,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는 과정에서 내외
적으로 많은 압박으로 홀로 아이를 키우며 대한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
국으로 간 그는 재혼하지 않고, 평생 베델을 기리고 자랑스러워했다. 대한민국은
조선을 사랑한 영국 언론인 베델에게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
여했고, 해외 독립유공자로는 처음으로 국가유공자 명패를 손녀인 수잔 선생의
자택에 달게 되었다.
【배델에 대한 재판 내용】
|1907.10.14 (1차 재판)
영국 총영사관에서 통감부의 압력으로 영사 재판에 넘겨졌다. 이유는 <대한매
일신보>의 기사가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
이다. 근신과 벌금 30파운드가 부과되었으나, 벌금을 대납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보낸 성금은 300파운드로 월등히 많았다. 이 성금은 베델이 더 강력한 항일, 반
일 논조의 신문을 만들 수 있게 한 요인이 되었다.
|1908. 6.15~18 (2차 재판)
일본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스티븐슨
에 대한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의
사살 사건 보도 후 일본의 요구로 재판
에 부쳐졌다. 일본은 영국이 자진하여
베델을 본국으로 추방하거나, 추방을
묵인해 달라고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
다. 베델은 발행인을 만함으로 바꾸고
신문 발행을 중단하였다. 3주간의 금고
형과 6개월간의 근신, 4000만 환의 벌
금이 내려졌는데, 벌금은 한국인 독지가
가 대납하였다.
25세 때의 배설 선생 모습 ⓒ배설선생기념 사업회
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