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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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 아바르 카간의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스트라시아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기베르 왕은
이는 9세기 비잔틴제국의 수도사이자 역사가 아바르의 2차 침입에서 포로가 되었다. 투르의
인 테오파네스(760-817)의 연대기에 나오는 기 그레고리우스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에 의하
록이다. 이 시기 판노니아의 아바르 영토로 이 면 이 프랑크 왕은 아바르족에게 많은 선물을
주한 대불가리아 주민들의 숫자는 상당했던 주고 아바르와 강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당
것으로 보인다. 헝가리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 시 아바르족은 갈리아 영토를 정복할 의도는
에 주민의 인종 구성이 크게 달라졌다고 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시기베르로부터 공납
데, 아마 이러한 이주도 주요 원인 중 하나였을 을 약속받고 물러갔다. 이후 상당 기간 아바르
것이다. 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존중하여 더 이상 침
아바르 제국은 7세기 중반 동유럽에서는 위 략행위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축되었지만, 서유럽에서는 여전히 위세를 유지 프랑크 왕국과 아바르의 관계는 8세기 후반
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 잡은 롬바 샤를마뉴 때 바이에른공국 문제로 급속히 악
르드족의 왕들은 아바르 카간을 상전으로 생 화되었다.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Tassilo)가 프랑
각하여 내란이 일어나면 아바르로 도망친다든 크족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바르족과
지 혹은 아바르 카간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 손을 잡은 것이다. 샤를마뉴는 그의 봉건 가신
하였다고 한다. 인 타실로가 이교도인 아바르족과 손을 잡고
자신을 배반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샤를마
프랑크 제국과 아바르 제국 뉴가 바이에른 공작의 지위를 박탈하자 아바
6세기 중반 아바르족이 판노니아 평원을 넘 르족이 프랑크 왕국을 공격하였다. 당시 아바
어 서쪽으로 진출하였을 때 아바르족은 프랑 르 군은 알프스 너머의 프리울리를 공격하고
크족과 충돌하였다. 당시 프랑크 제국은 오늘 바이에른 국경 지역을 침략하였다. 아바르족과
날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는 프랑크 왕국의 전쟁은 8년간(791-799)이나 계
데, 아바르 사절단이 비잔틴제국의 수도에 모 속되었다. 아바르족은 샤를마뉴의 지배에 대해
습을 드러낸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562년경 벌 불만을 품고 있던 작센족과 손을 잡기도 했지
써 아바르와 프랑크족의 충돌이 벌어졌다. 당 만, 전쟁은 결국 샤를마뉴의 승리로 끝났다.
시 프랑크 왕국은 여러 명의 왕들이 영토를 나 아바르 제국이 패배한 이유로는 아바르족
누어 다스렸는데, 그것은 왕자들 모두에게 왕 사이에서 일어난 내분을 무시할 수 없다. 카간
국의 영토를 나누어주는 프랑크족의 상속관 과 투둔 – 투둔(tudun)은 아바르 부왕(副王) 칭호
습 때문이었다. 시기베르가 가장 동쪽 땅인 오 가운데 하나였다 –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투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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