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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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수도원과 교회에도 많이 헌납하였다. 그리 는 이들의 이주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므
하여 비잔틴제국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황금이 로 슬라브족의 초기 역사는 아바르족과 떼려
아바르 제국을 거쳐 서유럽으로 흘러 들어가게 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
되었다. 다고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슬라브인들이 직접
샤를마뉴는 아바르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우 기록한 사서는 그로부터 몇 세기 이후에 나왔
두머리인 카간의 지배 아래 모여서 살도록 허 기 때문에 우리는 아바르와 슬라브의 자세한
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자치는 20여 년 후에 관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는 프랑크족의 직접 통치로 대체되었다. 자신 동양에서 온 유목민 아바르족이 유럽사에
들의 나라가 사라진 아바르 전사들은 예전에 남긴 또 다른 영향은 군사기술적인 것이다. 역
자기들의 땅이었던 곳에서 프랑크 왕국에 세 사가들은 기마 전사가 전투를 할 때 유용한 발
금을 바치며 사는 예속 농민이 되었다. 그 땅의 걸이인 등자(鐙子)가 유럽에 도입된 것이 아바
소유권은 대부분 독일 교회와 수도원의 수중 르족을 통해서라고 본다. 일견 굉장히 간단해
으로 넘어갔다. 판노니아의 이러한 아바르 농 보이는 등자가 이 시기에야 비로소 유럽인들이
민들은 점차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좀 의아하기는 하지
바르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 만, 7세기 초의 비잔틴제국 군사교범 《스트라
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9세기 말 아시아에서 테기콘》에 등자가 처음 언급되어 있다. 따로 등
온 새로운 유목민 전사들인 마자르인들이 판 자를 지칭하는 말이 없어 그리스어로 사다리를
노니아를 정복하였을 때 티자 강 상류 지역에 의미하는 ‘스칼라’라고 하였는데, 아마 말을 탈
서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 때 사다리처럼 이용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고 불가리아의 지배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붙었을 것이다.
아바르족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는 동유럽보다는 좀 더 늦은 시기
동양 유목민이었던 아바르인들은 훈 제국 에 등자가 도입되었다. 당시 서유럽을 지배하
이 멸망한 후 약 120년 후 동유럽 일대에 큰 세 던 프랑크 왕국이 등자 뿐 아니라 아바르의 기
력을 구축하였다. 훈 제국이 게르만 여러 족속 병대 조직과 전술 등 군사기술도 도입하여 프
들을 지배한 것처럼 아바르 제국은 슬라브족 랑크 왕국의 기마부대를 조직하였다고 여겨진
을 지배하였는데, 이 아바르 제국 시기에 슬라 다. 중세 유럽을 지배하던 봉건 귀족 계급이 기
브족은 유럽의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정착 지 마 전사로부터 나왔다고 한다면 아바르는 중세
역을 확대하였다. 아바르는 이러한 슬라브족의 유럽 봉건제의 흥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움직임을 촉발하기도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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