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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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正州)는 의려국(依慮國)이 도읍한 땅이다. 의려 지금도 일본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의라의 흔적
국 왕이 선비(鮮卑) 모용외에게 패한 뒤 핍박당할 『환단고기』에 의려국의 왕이 일왕이 되었다
것을 근심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이 는 기록이 있다 해도 곧이 곧대로 믿기 힘들지
때 문득, ‘나의 영혼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디에 않냐는 의견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
간들 이루지 못하리오?’라는 생각이 들어, 은밀히 다. 하지만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일본
아들 부라[扶羅(의라, 依羅)]에게 왕위를 넘기고, 백 내부에 또한 존재한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니, 따르는 자가 수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가지나 존재한다. 하나
천 명이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 는 오사카에 있는 “대의라신사(大依羅神社)”이며
고 왕이 되었다. 스스로 삼신(三神)의 부명(符命)에 다른 하나는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남아있
응한 것이라 하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하례 의식 는 의라씨족에 관한 기록이다.
을 올리게 하였다.(『환단고기』「대진국본기」)
기록상으로는 아버지 의려왕이 일왕이 된 것
인지, 아들 의라가 왕이 되어 일본에 건너와 일
왕이 된 것인지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
주에 있던 의려국의 마지막 왕이 일본으로 건
너와 왕이 되었고, 그 때 그 왕이 삼신의 명을
받아서 왕이 되었다고 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
고 이 왕의 흔적이 일본에서는 응신이라는 이
름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
정할 수 있다. 이렇듯 응신왕이 실제로는 외부
오사카시 남부에 위치한 대의라신사
에서 갑자기 들어온 세력이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가들은 만세일계를 만들기 위해 그 앞의
역사에 어떻게든 끼워 맞춰야 했을 것이고, 그 지금까지 기록을 위주로 살펴 봤으니 이번
로 인해 생긴 역사적인 틈을 메우기 위해 생긴 에는 형태가 남아있는 신사를 보자. “대의라신
파트가 바로 신공황후의 기록이라고 여겨진다. 사”는 오사카시 남부에 존재하는 신사로, 현재
실제로 일본에서는 신공왕후의 기록이 히미코 는 주길대사(住吉大社, 스미요시타이샤)의 말사로 존
의 활약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고 하는 재하는 신사이다. 일본식 이름은 “오오요사미
주장이 있는데 일리가 있다. 진쟈”라고 읽는데, ‘요사미’는 바다와 강이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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