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대한사랑 6월호
P. 50
신들의 왕이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때는 진씨족의 영향으로 팔번신은 일본의 역사 문화
절을 네 번하게 되어있다. 일본에서는 절을 하 를 낳고 지켜주는 것 뿐만 아니라 미래에 혼란
지 않으니 그 행위가 박수 치는 행위로 바뀐 것 에 빠진 일본을 구원해 줄 구원의 표상으로까
인데, 우좌신궁은 일찍이 삼신상제님을 모시던 지 여겨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조
풍습이 있기 때문에, 다른 일반신사에서도 두 선 땅에서 넘어온 팔번신이 일본의 대표 신으
번만 치는 박수를 이곳에서는 네 번 치게 된 것 로 자리잡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다. 일본 신사의 총본사라고 할 수 있는 이세
팔번신은 최초이자 최고의 한일교류 다리
신궁에서조차 박수를 두 번만 치니 우좌신궁
의 위격이 실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짐작할 일본이라는 나라가 670년에 세워져, 자신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삼신상제님으로 모셔 선조의 역사를 정리하던 7세기 말~8세기 초
지던 팔번신이 일본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자연 무렵은 660년에 멸망한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스럽게 신불습합이 진행되어 가는데, 실은 일 로 일본에 넘어와 그들을 주축으로 하여 일본
본에서 가장 먼저 신불습합이 이뤄진 신 또한 의 역사를 정리하던 때였다. 따라서 백제를 멸
팔번신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에서 가장 먼 망시킨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의 편에서 활약하
저 불교를 받아들인 곳이 우좌신궁 지역이라 던 진씨 일족과 그들의 신인 팔번신이 일본의
고 주장되는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는 이유이 초기 역사에서 배제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다. 어찌 되었든 신불습합을 해 가는 과정 속에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오랜 시간 일
서 팔번신은 처음에는 아미타여래이면서 미륵 궈왔던 정치・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결국 동
부처인 존재로 여겨지다가 나중에는 미륵부처 대사의 대불 조성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고,
님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팔번신앙 연구의 대 이어 왕실의 제2의 종묘가 되기까지 이르렀으
가인 나카노 하타요시는 이러한 점이 화랑도에 며, 겸창막부시대부터는 사무라이들의 대표적
서 모시던 미륵불 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친 부 인 수호신으로 자리 잡아 에도시대에 이르기
분이라고 해석했는데, 화랑도가 우리민족의 삼 까지 일본 전국 각지에서 최고의 신으로 모셔
랑문화를 계승한 문화라는 점으로 미루어 생 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떤 일본 신사보다 일
각해 볼 때 이 관점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겠 찍이, 그리고 완벽하게 신불습합을 완성시켰기
다. 신라의 미륵부처신앙은 미륵부처님께서 이 때문에 명치유신의 신불분리령에 가장 큰 피해
세계에 내려오셔서 말법에 빠진 중생들을 구해 를 입은 것 또한 우좌신궁이 있는 대분현(大分
용화선경낙원을 건설한다는 미륵하생의 신앙 縣, 오오이타켄)지역이었다.
이었는데, 가야, 신라와 깊은 영향을 맺고 있던 한반도에서 넘어와 일본의 역사 속에서 일본
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