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3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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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득청 선생은 영해 신씨의 시조로 받들어진다. 영해 신씨는 지금의 경상
북도 영덕군 영해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평산 신씨에서 분적된 성씨다.
평산 신씨가 어떤 가문인가? 시조이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은 팔공산 전투에
서 고려 태조 왕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왕건을 대신해 장렬히 죽음
으로써 왕건을 살리고 고려를 구한 만고의 충신이다. 이런 충절의 정신이 면
면히 이어온 평산 신씨는 고려 말 왕조 변혁기에 가장 심한 박해를 받은 가문
으로 신숭겸 이래 13세손 4명, 14세손 10명, 15세손 17명 등 모두 31명이 이
성계의 역성혁명에 저항하였다. 이 중 두문동에서 순절한 만고 충신들은 11
분에 이른다. 신득청 선생의 집안도 이런 역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신득청 선생의 후손들은 왜 본관을 평산에서 영해로 바꾸게 되었을까? 신
득청 선생이 살았던 당시 동아시아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건국되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공민왕(재위 1351~1374)은 그동
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를 부흥시키기 위해 원나라의 풍습과 연호 사
용을 금지시키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등 과감히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고 간신 신돈(辛旽)이 득세하며 고려는 망국의 길을 걷
게 된다.
이때를 전후해 신득청은 혼란스러운 나라를 바로잡고자 「역대전리가(歷代
轉理歌)」를 지어 왕에게 바치고 충언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공민왕이 죽임을 당하고 왕권을 이어받은
우왕마저 이성계에 의해 강화도로 쫓겨나가자 신현은 끝까지 우왕을 복원시
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항상 편지나 상소문 말미에 “왕재강화 동궁대리 신
모운운(王在江華 東宮代理 申某云云)”이라 하여 강화도에 감금된 우왕에 대한 충절
을 끝까지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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