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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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비록 숨어 지냈으나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고 결국 1980년대에 영해 신씨

            는 평산 신씨 판사공파로 회복하였으니 500여 년의 지난한 세월 동안 수많은 풍파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조선 도학(道學)의 뿌리, 신현(申賢)

              신득청 선생을 말할 때 조부이신 신현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신현은 고려 말 성리

            학을 이 땅에 뿌리내린 대학자로 멀리는 중국에도 명성이 드높아 ‘동방의 공부자(孔夫
            子)’, ‘신자(申子)’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과 제자들이 조선 개국에 끝까

            지 반대하고 은둔하면서 신현 선생도 조선 500년간 금기시되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조선 성리학의 학통이 안향, 우탁 선생으로부터 어떻게 포은 정몽주, 야은 이색으로 이
            어졌는지 그 계통이 밝혀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화해사전(華海師全)』을 통

            해 동방 도통(道統)의 연원이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화해사전(華海師全)』은 신현 선생의 제자이며 두문동 72현으로서 『환단고기』의 저자

            인 범세동, 원천석 등에 의해 편찬되었다. 『화해사전』은 화해사 신현의 전집이란 뜻으

            로 ‘화해사’란 원나라, 명나라 그리고 고려 3국의 스승이란 뜻이다. 실제로 신현 선생은
            1321년 고려 충숙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6년간 학자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연

                                            구하고 강연한 것을 시작으로 총 6차례에 걸쳐

                                            중국을 오가며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신현 선생이 원나라에 머물 때는 임금이었던

                                            영종(英宗)을 비롯해 배주(拜住), 유기(劉基), 송렴(宋

                                            濂) 같은 대학자와 학문을 논하였고 고려에 머무
                                            를 때면 원나라에서 수십 명의 학자들이 고려를

                                            방문하여 가르침을 청했다. 신현의 명성은 나날
                                            이 높아져 갔다. 공민왕 21년인 1372년에는 명

                                            태조 주원장으로부터 사부의 예우로 초빙받아

                                            문답을 나누고 명태조로부터 금자광록대부의 작
                                            위를 받았다. 이후 신현이 고려로 돌아가려고 하

               화해사전 표지 ⓒ국립중앙도서관             자 주원장은 몹시 아쉬워하며 “문채나는 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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