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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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끝내 잊을 수 없도다”란 『시경』 구절을 인용하며 “불훤재(不諼齋)”란 호를 하사했다.

                      1377년 선생이 돌아가시자 명태조는 선생이 오가며 쉬고 강의하던 요동 문회산(文會山)
                       에 선생을 후히 장사지내고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신현이란 이름과 함께 『화해사전』은 조선 500년간 역사 속에서 철저히 삭제

                       되었다. 책은 정치적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불살라졌지만 원(元)·범(范)·공(孔) 세 집안
                       에 비장되어 내려왔다. 중국 절강대학교 주생춘 교수는 『화해사전』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고 2005년 중국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며 동북아 유학사(儒學史)에서 신현은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일대 종사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렇게 숨겨져 있던 역사적 사실은 조선 왕조가 서서히 기울어가던 1850년경 평안도

                       공씨 집에 비전되던 『화해사전』이 발견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유림들이 『화해사
                       전』을 읽어보고 일어나 경기도 용인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서 850여 명이 모여 공의를

                       결정하는 대회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그 후 1920년경 충남 서천군 비인현 율리사에서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인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아성(鵝城) 이명직(李明稙) 선생이 서문

                       을 쓰고 처음 간행된 이후 지금은 여러 영인본이 전해지고 있다.

                        『예주세록』에서 허전(許傳) 선생은 신현을 일컬어 “백대지사(百代之師)”로 칭송하며
                      “100대가 지나도 선생의 말씀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였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신

                       자(申子) 신현의 학통을 살펴보면 그의 스승은 뛰어난 역(易)학자로 손꼽히는 우탁(禹倬)

                       선생이다. 우탁은 경사에 통달하고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앞날을 내다보는 등 많은 전
                       설을 남긴 인물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안향 선생의 제자다. 신현은 진

                       실로 안향-우탁으로 이어지는 조선 도학의 계통을 이은 대학자이며 또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범세동, 원천석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신진사대부를 길러낸 스승이기도 하
                       다.

                        우탁은 『역동선생실기』「문인록」에서 신현을 제일 첫머리에 언급하며 “격물치지의 성
                       정(誠正)의 학문을 널리 밝혀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며 극찬하였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학맥을 신현에게 전수했으니 그를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런 기록들은 범세동의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와 『상산김씨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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