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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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한 사건으로 신득청의 집안은 일대 파란에 휩싸이게 된다. 신득청의 형 신백청
이 우왕을 복위시키기 위해 밀서를 올리고 이성계 부자를 치려다가 발각된 것이다. 결
국 이 사건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신현의
제자이며 평소 뜻을 같이 했던 이색, 정몽주, 유번 등 동료들의 탄원으로 신득청은 간
신히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결국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신백청 선생은 통곡하며 동해에 투신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고려 왕조를 향한 신씨의 뜨거운 충절은 식지 않았다. 태종 이
방원이 왕이 된 후 어지러운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정몽주를 사면하고 벼슬을 추서하
려 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신득청 선생의 아들인 신자성(申自誠)은 “정몽주가 살아서도
조선의 녹을 먹지 않았는데, 어찌 죽어서 조선의 벼슬을 받겠느냐”며 “조선에서 내리는
작위(爵位)나 시호(諡號)는 더러워서 옳지 못하며 이것은 천리를 더럽히는 해독(害毒)”이라
며 상소를 올리며 비판했다. 당시 시국은 그야말로 살얼음을 걷듯 매서운 한파가 몰아
치던 때였는데, 신자성은 결코 굴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자 분노한 조선의
조정은 신득청 집안의 처자까지 죽여버리고 그 집마저 헐어서 못을 만들어 버렸는데,
그 집터에 못을 판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지금의 못골이 바로 그곳이다.
한때 동방의 대학자로 명망을 떨치던 신현-신용희-신백청·신득청으로 이어지던 한
가문이 한순간에 멸문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안의 뜨거운 충절과 절의에 감동
한 하늘이 구사일생의 삶의 길을 터주었다. 조선 조정에서 신득청 집안을 몰살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안 운곡 원천석이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신득청의 쌍둥이 손자인 신영
석(申永錫), 신중석(申仲錫)을 숨겨주어 집안의 맥을 잇게 하였다. 원천석은 이들 두 아들에
게 “앞으로는 성씨를 평산 신씨에서 영해 신씨로 개관(改貫)하고 벼슬을 버리고 숨어 살
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비록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숨어들었으나 그들의 핏속에 흐르는 나라를 향한 뜨거
운 충절의 정신은 고고히 이어지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득청의 후손인 신예
남(申禮男)은 청송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사로잡히고 말았다. 왜적은
그의 높은 지조에 감명받아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신예남은 자신의 옷을 벗어 부하에게
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절개를 지켰다. 그의 부인 민씨도 남편의 소식을 듣고 왜적을
찾아가 저항하다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신예남의 동생 지남(智男)은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종군하며 왜적을 물리친 장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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