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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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단군본기』로 제목이 다르고, ‘단’ 자도 부루태자는 그곳에서 사공(司空) 우(禹)에게 오행
壇(제단 단)과 檀(박달나무 단)으로 다르게 표기되어 치수의 법(五行治水之法)을 전수하여 홍수 문제를
있다. 따라서 동일한 문헌이라고 단정할 수는 해결하도록 도왔다. 이는 9년 대홍수를 극복하
없지만, 내용상으로는 단군이 하백의 딸과 관 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자, 동아시
계하여 부루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핵심 서사 아 고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
는 일치한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에는 심각한 왜곡이
결론적으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모두 존재한다. 부루태자의 존재는 중국 문헌에서
단군왕검의 아들이 부루(夫婁)임을 명확히 기록 삭제되었고, 단군왕검과 단군조선 또한 역사에
하고 있다. 이 두 문헌이 서로 다른 사료를 인 서 사라졌다. 동양 상고사에서 가장 심대한 조
용하고 있음에도 같은 인물을 언급하고 있다 작이 바로 이 ‘9년 대홍수 사건’인 것이다.
는 점은 그 사료적 신뢰를 높여준다. 그러나 이 대사건은 중국과 한국의 고대 문
따라서 ‘초대 단군의 아들은 부루’라는 명제 헌 모두에 기록되어 있어, 비교 연구를 통해 부
는 우리 고대 문헌을 기반으로 충분히 뒷받침 루태자의 실존과 그 업적을 충분히 검증할 수
되는 사실이며, 단군조선의 역사와 계보를 복 있다. 부루태자가 단군왕검의 명을 받아 중원
원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의 재난을 구제했다는 이 서사는, 단군조선이
단지 신화적 존재가 아닌 실질적·국제적 영향
단군왕검, 부루태자를 보내 9년 홍수의 중원을 구 력을 행사했던 고대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중
하다 요한 역사적 단서다.
약 4300년 전, 단군조선 초기에는 중국 대륙
을 위기로 몰아넣은 ‘9년 홍수’라 불리는 대재 부루태자, 낭야성에서 순임금을 만나다
앙이 발생했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초대 단
군왕검 재위 50년이 되던 정사년, 조선 땅인 한 갑술년에 부루태자가 명을 받고 특사로 도산에
반도와 만주 일대에 먼저 대홍수가 일어났다. 갈 때 도중에 낭야에 들러 반달 동안 머무르며 백
이에 단군은 신하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치수에 성의 사정을 묻고 들었다. 이때 우순이 사악을 거
나서게 했으며, 무오년에는 강화도 마리산에 느리고 치수에 대한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제천단인 참성단을 쌓아 천제를 올렸다. -『환단고기·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 상」
그로부터 17년 후, 중국에서도 역사적인 대
홍수가 발생한다. 이때 단군왕검은 맏아들인 단군왕검이 맏아들 부루 태자를 산동성 제
부루태자를 중국 도산(塗山)으로 파견하였다. 성현에 있는 낭야성(琅邪城)에 보냈다. 낭야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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