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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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은 낭야는 삼한의 하나인 번한의 초대 왕 치 지금 중국 현지에서도 낭야성이라 한다. 낭
두남(蚩頭男)의 아들이다. 단군왕검께서 치우천 야를 알 수 있는 기록은 『환단고기』밖에 없다.
황의 직손 치두남을 번한 왕으로 삼았는데, 그 갑술년에 부루태자가 번한왕이 다스리는 냥야
아들 낭야가 원래 있던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해 성에 먼저 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
서 낭야성이라 한 것이다. 라고 하겠다.
주요 내용1 주요 내용2
『삼국유사』(1281년) 단군이 서하 하백녀와 요친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은 부루다.
『제왕운기』(1287년) 비서갑 하백녀와 혼인하여 남자아이를 낳으니 이름이 부루이다.
『단군세기』(1363년) 부루태자와 부루단군으로서의 행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 우가 도산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 부
(1454년) 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이다. 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하나라 우왕 때에 이르러 제후들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 들어 부
「응제시주」(1462년) 도산에 모일 때, 단군은 태자 부루를
루를 낳았는데..
보내었다.
낭야산 정상의 낭야대 진시황이 서복에게 불로초를 찾아 동방으로 가라고 지시하는 모습의 조각상들이 있다.
『태백일사』에는 감우소(監虞所, 우순의 정치를 감독하는 곳)를 낭야성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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