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대한사랑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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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 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출
립신문> 논설에서 몽양의 이러한 활약을 ‘독립 옥하였다.
운동사에 있어, 유례없는 성과’라고 대서특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과 조선 건국
하였고, 34세의 몽양은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 준비위원회 결성
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몽양의 일본행을 결연히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에 취임하
반대하던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는 ‘국무총리 였으며,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맡았다.
포고 2호’를 발표해 몽양의 항일 활동을 공식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
적으로 인정하였다. 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신문이 폐
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2년 치안유
몽양 여운형 혁명가의 삶 지법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
여운형은 경기도 양근군(지금의 양평) 출신으 예 3년을 선고받았다.
로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호는 몽양(夢陽)이다. 1944년 8월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고 독립운
어머니가 태양을 치마폭에 품는 꿈을 태몽으로 동과 국가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
꾸었다고 하여 지어졌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 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이
고 총명하게 생겨서 할아버지는 그를 보고 왕 되자 건국 준비를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재(王材 : 왕이 될 인재)라고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해방
여규신(呂圭信)은 동학의 북방 포교를 위해 제2 후 혼란을 수습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대 교주 최시형을 만나는 등 집안 사람 대부분 해소되고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이
이 열렬한 동학교도였다. 되었으며, 김구·이승만·안재홍·송진우 등과 만
몽양은 1919년 재일유학생의 2·8 독립선언 나 국가건설 방안 등을 협의하였다. 11월에 건
과 3·1운동에 관여하고,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 국동맹을 모태로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여 당수
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로 결정하였으 직을 맡았으며, 미군정 장관의 고문을 맡기도
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썼 하였다.
으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 1946년 2월에는 조만식과 김일성을 만나 미
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에 단학회의 고 소공동위원회의 대처 문제 등을 논의하였고,
문으로 활동했다. 1923년 임시정부의 진로를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 통일에 기
비롯한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개조를 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장하였으며,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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