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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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을 떠난 것이다. 주치는 네 명의 부인을 두었다. 제2차 서방원정
몽골 제국에 속하는 일한국에서 재상을 지낸 주치의 차남 바투가 물려받은 영토는 엄밀하
역사가 라시드 앗딘의 기록에 의하면 주치의 아 게 경계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볼가강
들들은 후궁에서 난 아들까지 포함하여 40명에 너머 몽골군의 말발굽이 닿는 데까지”라고 한
달했다고 한다. 장남인 오르다와 차남인 바투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쪽 경계는 매우 막연해
가 아버지의 영지를 분할상속하였는데 오르다 서, 정복을 통해 확실한 지배 영역으로 만들어
는 동쪽, 바투는 서쪽을 차지하였다. 야 했다. 바투의 사촌들이 대거 참여한 이 서방
바투의 영지는 루시 땅 즉, 러시아와 근접해 원정은 원정군이 1236년 봄 서시베리아를 출발
있었다. 1235년 쿠릴타이에서는 그러한 지리적 하면서 막을 올렸다.
위치를 고려하여 바투에게 유럽원정의 과업을 15만 명에 달하는 원정군이 처음 맞닥뜨린
맡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투에게는 병력이 상대는 불가리아였다. 오늘날처럼 다뉴브 강변
많지 않았다. 칭기즈칸이 네 아들에게 유산을 에 있던 불가리아가 아니라, 러시아 땅 볼가강
배분할 때 병력도 배분하였는데 막내 톨루이에 상류에 있던 불가리아였다. 명장 수부타이가 지
게는 10만 이상의 몽골군을 주었지만, 주치에 휘하던 몽골군 우익은 이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게는 불과 4천 명을 주었다고 한다. 이 병력으 쉽게 정복하였다. 볼가 불가리아는 투르크어를
로는 원정이 어려워 그는 비몽골족을 대거 받아 하는 유목민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던 유목
들였다. 그 가운데 타타르족을 비롯하여 투르 국가였다. 물론 이슬람 지역으로부터 러시아 북
크인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훗날 바투의 영지 부로 가는 교역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도시
인 바투 울루스가 ‘타타르의 나라’로 불리게 되 도 있었다. 수도인 ‘볼가’는 오늘날의 카잔에서
었다. 멀지 않은, 볼가강과 카마강의 합류 지역에 있
1235년 쿠릴타이에서는 바투가 유럽원정군 었다고 하는데,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총사령관을 맡되 그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기 때 불가리아를 정벌한 다음 몽골군은 러시아로
문에 모든 ‘울루스’(제국을 구성하는 몽골족의 나라) 들어갔다. 당시 키예프 루시인들은 여전히 각
가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236년부 공국 간의 내분에 빠져 있었다. 14년 전의 제1
터 1242년까지 수행된 유럽원정은 흔히 ‘바투 차 원정 때 몽골군에 패했던 쓰라린 기억에도
의 원정’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은 칭기즈 불구하고 공국들은 서로 싸우느라 몽골에 맞서
칸의 손자들이 대거 참여한 몽골 제국 전체의 연합군을 결성하지 못했다. 몽골군은 파죽지세
원정이었다. 로 진격하였고, 모스크바 남동쪽 200km 거리
에 있는 랴잔 공국, 랴잔 공국과 모스크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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