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대한사랑 10월호
P. 68

음에는 사라이로 가서 바투에게 머리를 조아리                     사후에 칸이 된 인물이다. 반란을 일으킨 자신

            며 충성을 맹세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몽골                      의 동족들을 용서해달라는 알렉산드르 네프스
            의 지배를 벗어날 계획을 세우고 교황과 폴란                     키의 간청은 성과가 있었다. 그는 수개월 간 베

            드, 헝가리 등의 지원을 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                   르케의 본영에 머물면서 베르케로부터 수즈달

            을 하였다. 그는 또 자신과 협정을 맺고 있던 리                  에 징벌군을 파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투아니아 대공의 지원도 기대하였다. 이러한 지                    었다.

            원을 염두에 두고 그는 1256년 몽골에 반기를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귀환하는 길에 병으
            들었다. 볼리냐에 주둔하던 몽골군을 공격하여                     로 사망했는데, 후일 러시아인들을 그를 성인의

            몰아냈지만, 몽골군은 곧 볼리냐와 갈리치아를                     반열에 올렸다. 그는 몽골의 지배라는 현실을

            다시 장악했고, 항복을 거부하는 몇몇 지역들                     받아들인 타협주의자였다. 몽골 지배자들의 앞
            을 초토화시켰다. 다니엘은 폴란드와 헝가리로                     잡이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 이익

            도망쳤지만, 믿었던 리투아니아인들이 오히려                      이 아니라 러시아인들의 생존을 위해 현실적 선
            볼리냐를 급습하고 자기 아들 로만 왕자를 죽                     택을 했던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자, 절망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와 몽골의 지                     킵차크의 베르케 칸은 최초로 이슬람으로 개

            배에 굴복하였다.                                    종한 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 원정에서
              갈리치아공 다니엘의 저항은 러시아 지배                      돌아오던 길에 부하라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계급의 반란에 속한다. 그 외에 러시아 민중의                    때 부하라에 온 무슬림 카라반 상인으로부터

            저항도 있었는데, 원인은 무거운 세금이었다.                     그들의 신앙에 대해 듣고 개종하게 되었다고
            1262년 동부 러시아의 수즈달 지역에서 일어난                   한다.

            반란이 그러했다. 세금 징수를 맡았던 몽골인

            과 러시아인이 분노한 민중에 의해 살해되는 사                    몽골의 러시아 지배
            건이 일어났다. 민중의 반란이 일어나자 블라디                     러시아인들은 1240년부터 1480년경까지 몽

            미르 대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입장이 매우                     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는 고려가 1231년부터
            난처해졌다. 그는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                   1360년경까지 13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은 것

            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반란자들을                    보다 백년 이상 긴 기간이다. 러시아인들은 이

            용서하도록 칸에게 청원하기 위해 사라이로 갔                     러한 몽골의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
            다. 당시 킵차크 칸은 바투의 동생 베르케(재위                   다. 타타르는 원래 몽골 초원지대에 살던 투르

            1257-1266)였다. 그는 1255년 바투가 죽고 그              크계의 부족이었다. 7세기의 고대 투르크 비문
            뒤를 이은 바투의 두 아들인 사르탁과 울락치                     에는 ‘13성 타타르’(오투즈 타타르)라는 표현이 등



            68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