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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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장하고, 한문사료에는 ‘구성달단(九姓韃靼)’이 기 몽골 당국은 주민의 수를 집계하여 해당 지
록되어 있으므로,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족속 역의 징집 가능자 수를 확정하였다. 징집 단위
으로 보인다. 14세기 초에 몽골족의 역사를 남 로 십호, 백호, 천호, 만호 등이 있었는데, 십호
긴 라시드 앗딘의 『부족지』에 의하면 당시 널리 는 열 명의 병사를 제공해야 하는 단위이고, 천
알려져 있는 부대와 군주가 있는 타타르 종족 호는 천 명의 병사를 제공해야 하는 단위였다.
이 6개나 되었다고 한다. 몽골 제국은 러시아 남성 인구의 10%를 병사로
몽골사에 대한 방대한 저서를 남긴 영국의 요구하였다. 여성을 포함하면 전체 인구의 5%
헨리 하워드 경은 몽골 제국이 등장하기 한참 를 병사로 요구한 셈인데, 그렇다면 1만 명의
전부터 이미 타타르족은 유럽인들에게 그 이름 병력을 제공해야 하는 만호는 주민 수가 20만
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이 명 정도였을 것이다.
몽골족과 그 지배하에 있던 투르크족을 통칭하 베르낫스키에 의하면, 만호는 서부 러시아에
여 타타르족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6개, 동부 러시아에 27개가 있었다고 한다. 블
러시아인들은 바투 원정군 가운데서 타타르족 라디미르 대공국의 경우, 무려 15개의 만호가
의 부대를 먼저 접하고 몽골족을 모두 타타르 설치되어 있었을 만큼 큰 공국이었다. 물론 만
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호가 설치되지 않은 곳도 있었는데, 교회 영지
몽골은 러시아 땅을 정복한 후 바로 인구조 는 말할 것도 없고 노보고로드와 프스코프 같
사를 실시하였다. 인구조사는 병사를 징집하고 은 특권 도시 및 툴라와 같은 칭기즈칸 가의 직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할 영지 등이 그러하였다.
행정 조치였다. 칸은 러시아 공들에게 ‘야를릭’ 몽골의 지휘관들은 천호장과 만호장에 임명
이라는 임명장을 수여하였는데, 러시아 공들이 되었다. 베르낫스키에 의하면, 이들 지휘관들
칸의 신임을 잃으면 언제라도 야를릭을 회수할 즉 ‘바스칵’ 밑에는 징세감독관인 다루가치가
수 있었다. 자신들의 지위를 몽골 칸에게 의존 배속되었다. 다루가치는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하게 된 공들은 인구조사에 적극 협조하였다. 병사를 징집하며, 또 역참(얌)을 설치하고, 세금
앞에서도 언급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당시 을 거둬 중앙으로 보냈다. 바스칵은 지방의 요
러시아의 대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노보고로 지에 몽골 및 투르크족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
드 시민들이 인구조사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 대를 유지하였다. 러시아 공들은 바스칵의 군
키자,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몽골 관헌에 대만으로는 소요나 반란을 진압하기 어려울 경
의한 인구조사가 차질 없이 이루어지도록 조치 우, 자신들 휘하의 부대를 동원하여 바스칵을
하였다. 지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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