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5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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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이루어졌다. 세 방면으로 나뉘어 몽골군은 수                     넜다.

            도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결전은 부다페스트가                      그런데 카단(차가타이의 아들) 휘하의 몽골
            아닌 동북쪽의 ‘무히’라는 마을 부근에서 이루                    군 파견대가 벨라를 잡으러 오고 있다는 정보

            어졌다. 리그니차 전투 후, 불과 이틀만인 1241                 가 본인에게 전해졌다. 벨라는 자그레브에서

            년 4월 11일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벨라 왕의                   달마티아 해안 지방으로 도주하였다. 쫓고 쫓
            군대는 바투와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몽골군에                      기는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몽골군은 종내 벨

            참패하였다. 태반의 병력을 잃은 벨라 왕은 서                    라 왕을 사로잡지 못했다. 몽골 부대는 왕은
            쪽 오스트리아로 도망갔다. 그런데 당시 바벤                     붙잡지 못하고, 경치 좋은 이 크로아티아의 해

            베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공 프리드리히 2세                      안을 따라 오늘날의 알바니아 국경까지 내려

            는 헝가리 왕의 곤경을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영                    갔다. 몽골군은 초원이 없고 산지가 많아 초원
            토를 확장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그가 영토와                     의 전사들에게 불리한 지형인 달마티아 지방까

            돈을 요구하자 벨라 왕은 더 이상 오스트리아                     지 온 셈인데, 이곳이 몽골군이 진격한 최남단
            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헝가리 남쪽의 크로아                   이었다. 벨라를 찾지 못한 카단 부대는 알바니

            티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 교황에게 십                    아에서 발칸 반도 내륙으로 들어가 불가리아로

            자군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고 또 신성로마제국                     향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독일의 제후군을                       몽골군은 헝가리 공격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조직하여 헝가리를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서한                      서진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 전초부대가 독일

            을 발송하였다. 물론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결                    까지 진출했지만, 본격적인 원정이라고는 할 수
            실을 보지 못했다. 교황청은 기껏해야 이교도인                    없다. 다만 몽골군이 서유럽을 공격하지 않아

            몽골군에 대항할 십자군을 조직하라고 군주들                      서유럽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

            에게 호소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교황 그레고                    하다. 몽골군이 서유럽 공격을 단념하고 헝가리
            리우스 9세가 8월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십                    에서 철수한 이유는 1242년 봄에 전해진 대칸

            자군도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교                    오고타이의 사망 소식 때문이었다. 오고타이 칸
            황당과 싸우고 있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                      은 1241년 12월에 사망했는데, 그 소식이 헝가

            리드리히 2세는 독일 왕으로 있는 아들 콘라드                    리 주둔군에게 이듬해 봄에야 전해졌던 것이다.

            에게 독일 제후군을 조직하여 도와주라고 했지                     몽골족은 대칸의 계승 원칙이 따로 정해져 있지
            만, 소규모 독일군도 ‘타타르 군대’가 다뉴브강                   않았다. 칭기즈칸 집안의 사람들이 모여 쿠릴타

            에서 진격을 멈추었다는 소식에 해산하고 말았                     이를 열고 대칸을 선출해야 하는데, 당시 상황
            다. 12월에 몽골군은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                    으로 볼 때 오고타이의 장자 구육이 대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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