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6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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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오고타이 집안과 사이 성이 이렇듯 몽골 침략의 한 결과였다고 지적한
가 나쁜 바투의 입장에서는 원정 때문에 유럽에 다. 군사적으로 몽골의 침략을 격퇴하지 못해
머물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하였을 것 도망 다니던 수모를 겪었던 벨라 4세는 몽골의
이다. 2차 침입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나라 곳곳에
유럽을 상대로 원정을 계속할 이유를 찾지 요새를 건설하여 헝가리 ‘제2의 건국자’라고 불
못한 바투는 자신의 군대를 볼가강 하류 지역 리게 되었다. 그러나 벨라 왕이 이렇게 몽골의
으로 이동시켰다. 볼가강 유역을 중심으로 광 재침에 철저히 대비하였지만, 몽골군은 헝가리
활하게 펼쳐진 남러시아 일대의 킵차크 초원뿐 로 다시 오지 않았다.
아니라 러시아도 그의 지배하에 들어왔기 때문
에 그는 이 광대한 지역을 공고히 하는 것이 현 킵차크 한국
명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볼가강 하류에 몽골 제국을 구성한 여러 울루스들 가운데
수도 사라이를 건설하였다.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유럽과 직접적인 관계를
아드리아해의 한 섬으로 도주했던 헝가리의 맺었던 것이 킵차크 한국이다. 킵차크 한국은
벨라 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몽골군이 퇴 앞서 살펴 본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영토 즉
각한 후, 헝가리로 돌아와 열심히 요새들을 건 ‘주치 울루스’로부터 나왔다. 1227년 주치가 죽
설하였다고 한다. 평지에서는 몽골군과 싸워 이 자, 칭기즈칸은 주치의 장남 오르다에게는 볼
길 가망이 없지만, 튼튼한 성벽을 가진 요새가 가강에서부터 발하슈 호수까지의 영역을, 차남
있으면 항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었기 때문 바투에게는 볼가강 서쪽의 영토를 영지로 주었
이다. 곳곳에 요새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방 제 다. 막내 샤이반은 오르다 영지의 북쪽에 있던
후들의 협조가 필요했는데, 지방 제후들만이 요 땅을 주었다. 바투의 영지는 서쪽 경계가 확정
새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 되어 있지 않아 바투가 정복하는 곳은 모두 그
이었다. 그리하여 벨라 왕은 제후들에게 토지 영지에 편입되었다. 바투 울루스의 중심 지역에
를 양여하고 많은 특권을 부여하였다. 유목민 는 투르크 계통의 킵차크인들이 살고 있었다.
의 후손인 헝가리인들은 도시생활을 반기지 않 초원지대의 다른 유목민처럼 킵차크도 여러 부
았으므로 인력이 부족해지자, 왕은 외국인들을 족들의 연합체였다. 킵차크에게 정복당한 페체
불러들였다. 폴란드인, 슬라브인, 루스인, 루마 네그 및 오구즈, 키멕, 카를룩 등 다양한 투르
니아인, 심지어는 헝가리인들에 의해 몽골의 첩 크계 유목민 집단들이 킵차크 연맹에 속해 있었
자로 오해받아 쫓겨났던 킵차크족까지 널리 불 다.
러들였다. 일부 학자들은 헝가리의 인종적 다양 영어권에서는 바투의 킵차크 한국이 ‘금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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