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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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콜롬나 공국, 그리고 북쪽의 블라디미                    수 받아들였는데, 이때도 그러한 전례를 따른

            르 공국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당시 블라디미르                    것이었다. 헝가리 왕 벨라 4세의 입장에서도 자
            공국의 공이 대공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블                    발적으로 헝가리 땅으로 들어와 자신을 주군으

            라디미르 공국은 대공이 다스리던 수즈달과 함                     로 섬기겠다는 킵차크인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

            께 모두 함락되고 대공의 가족을 포함한 많은                     었다. 그들은 충실한 병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1238년 2월의 일이었다.                  게다가 헝가리인들처럼 기독교로 개종하겠다

              몽골 원정군 총지휘관 바투는 일부 부대만을                    는 약속도 하였다. 벨라 왕은 그 약속에 감동하
            이끌고 다시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상업도시 노                    였던지 그들을 맞기 위해 몸소 국경까지 행차

            브고로드를 향해 북진하였다. 그러나 춥던 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몽골군으로 하여

            씨가 갑자기 따뜻해지면서 눈이 녹아 노브고로                     금 헝가리를 공격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드 주변이 늪지대로 변해버렸다. 바투는 진군을                     몽골군의 좌우익은 다시 하나로 합쳐서 드네

            멈추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돈강까지 진                     프르 강변에 위치한 루시의 수도 키예프(현재
            출한 몽골군은 돈강 부근의 스텝 지역에서 휴                     우크라이나에서는 ‘키이우’라고 부른다)를 공격

            식을 취하며 1239년을 보냈다. 그동안의 전투                   하였다. 키예프는 항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에서 상실된 병력은 킵차크족에게서 징집한 인                     심지어는 사절까지 죽여버렸다. 몽골군의 복수
            원으로 벌충하였다.                                   는 피할 수 없어서 1240년 12월 키예프는 함락

              당시 몽골군 좌익은 칭기즈칸의 4남 톨루이                    되고 주민들은 몰살되었다. 일부 키예프 지도자

            의 장남인 몽케가 이끌었는데, 몽케는 후일 4대                   들이 폴란드와 헝가리로 도주하였는데, 이것이
            대칸이 되는 사람이다. 그의 부대는 남쪽의 볼                    또 몽골군의 폴란드와 헝가리 침략 구실이 되

            가강 하류로 향했다. 카스피해 북쪽의 초원지                     었다.

            대는 킵차크족의 영역이었는데, 이 킵차크족은                      키예프에서 몽골군의 일부는 계속 서진하여
            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두머리가 도                     폴란드의 서부에 위치한 실레지아 지방까지 진

            망 다니다 잡혀 죽을 때까지 싸웠다. 일부 주민                   격하였다. 리그니차 전투(1241년 4월 9일)에서
            들은 산 넘고 물 건너 헝가리 평원까지 도주하                    실레지아 공작 하인리히의 군대는 몽골군에 참

            였다. 4만 명에 달하는 무리가 헝가리로 갔다.                   패하였으며 공작도 붙잡혀 살해되었다. 이 때

            헝가리는 흑해 북안에서 예전에 자신들의 조                      전사한 폴란드 군사들의 잘린 귀가 아홉 부대
            상을 쫓아냈던 킵차크인들에게 기꺼이 피난처                      나 되었다고 한다. 남쪽 모라비아 지방도 공격

            를 제공하였다. 그 이전에도 헝가리는 스텝 지                    을 받아 많은 곳이 폐허로 변했다.
            역에서 이주해오는 소규모 유목민 집단들을 다                      헝가리에 대한 공격은 훨씬 더 큰 병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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