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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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원래 벼슬에 뜻이 없었던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난한 형편에 성균관에
들었고, 오히려 새 세상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고자 노력했던 모습, 당시 유명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던 모
습, 과거를 보아 성균관에 들었던 모습 등은 야은을 쉽게 무욕의 인사로만 보기 어렵게
한다. 다음 글을 보면 오히려 그의 포부는 학문이 성취되면 벼슬에 나가 뜻을 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 천하고 미천하여 더 미천할 게 없다. 여덟아홉에 산에서 (...) 캐며 양(羊)을
기르고, 나이가 들어 힘써 밭 갈고 학문을 닦아 ... 아래로 어버이를 봉양하고 위로 임금을 섬기
되, 어버이는 즐겁게 하고 임금은 요순이 되게 하며, 우임금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은주의 세상
이 되는 것이 내 평소의 뜻이었다. ... 망국의 한을 당하여 10년 애쓴 공부는 허사가 되었도다.
슬프다. 하늘이 하는 일이니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스스로 자취를 감추고, 달 아래 갓
벗어 걸고 바람 앞에 시를 읊으며 ... 성명(性命)의 바름(正)을 보존하련다. ... 어찌 천 필의 말과
만 가지 부귀를 부러워하랴. - 『후산가서(後山家書)』
조선 성리학의 정신적 토대
고려 말기의 성리학을 조선조로 전수하는데 고리 역할을 한 사람이 야은이다. 즉 학
문과 실천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잇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목은-포
은-양촌에게 성리학의 맥을 이어받은 야은은 선산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하 김숙자(金叔滋)를 통해 김종직(金宗直, 김숙자의 아들)에게 학문이 전수되었고, 이후 김
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선 중기 사림파의 학맥을 형성했다. 이들 사
림파는 야은을 학문적 뿌리로 삼고, 그가 지킨 절의와 실천적인 성리학 정신을 높이 받
들었다.
가령 ‘불사이군’ 정신은 여말 이후 세조의 찬위 과정에서 재점화 되었다. 야은의 문인
조상치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일에 항거하였다. 사육신인 성삼
1)박의중(朴宜中, 1337-1403)은 목은의 제자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문장이 우아하기로 유명하였다. 부조현(不朝
縣)은 개성 동남쪽에 있는 고개로 ‘조회를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문동 72인이 이곳에서 조
복을 벗었다. 영조 대왕 16년(1740)에 부조현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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