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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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사마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
균관 박사, 문하주서로 승진하였으나, 38세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노모를 봉양하
며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공양왕이 이미 고려의 왕이 아닌 것을 알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
의를 지켰다. 48세에 당시 세자였던 이방원이 “재(再)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같이 공부하였는데, 못 본 지 오래 되었다.”며 정종에게 천거하였다. 관직이 제수되었으
나, 끝내 정중히 사양하고,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지극히 빈한한 생활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며 조정의 도움을 거절하
였고, 주변의 도움도 “물건이 아무리 풍족하다 한들 그 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
고 하여 최소한으로 받고 사양하였다. ‘하늘의 뜻을 즐기고 삶의 순리를 아는’ 낙천지
명(樂天知命)의 자세를 굳건히 지켰던 그의 삶은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훗날 많은 조선
학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금오서원. 야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철
거되지 않았다. ⓒ지역N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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