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6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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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의 실천과 후대에 끼친 영향
야은은 배운 바를 일상생활에서 철저히 실천하는 학행일치(學行一致)의 삶을 살았다.
그의 도학 사상은 효와 충절, 제자 양성을 통해 완성되었다.
효행과 군사부일체
야은은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다. 아버지가 새 부인을 맞이하자 이
를 원망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누그러지게 달래었고, 계모 노씨의 박대에도 효성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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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노씨가 재보를 친자식처럼 대우하였다는 등의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이렇게
투철한 효행은 사회적으로 민중의 마음을 움직여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부모를 봉양
한 스님이 수십 명에 달하였다. 그의 아우 구(吉久) 역시 형에게 감화되어 환속하였다.
특히 여말 사대부가에서 친상은 100일간 치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야은은
부모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의 예법에 따라 3년 동안 극진히 묘를 지켰다. 65세에는
장인상을 당하였는데, 상주가 종군(從軍)하여 없음에, “신씨 가문에서 받은 은혜가 크
다.”며, 상복을 입고 상주가 올 때까지 대신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실천은 조선의 예법
과 풍속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공양왕 3년(1391)에는 우왕의 부음을 듣고 3년 동안 방상(方喪: 부모 상례에 견주어 의리로
은혜를 아우름)하였고, 57세, 65세 때에는 스승인 권근과 박분의 죽음에 각각 3년간 심상
(心喪: 친상을 입은 사람과 같은 마음으로 근신)을 입었다. 스승 권근이 죽자 “옛날에는 백성이
군사부 그늘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똑같이 섬겼는데, 이 세상에는 임금이나 부친을 위
하여 복을 입어도 스승을 위하여 복을 입는 이는 없다.”고 개탄하며, ‘군사부일체(君師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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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體)’의 가르침을 몸소 실행하였다.
충절과 낙천지명(樂天知命)
조선 건국 후 고려의 신하들은 점차 조선 조정에 참여하였다. 야은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의리를 생활
화하여 이 정신이 조선에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정신은 부녀자들에게도
이어져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로 본받아졌다.
이에 장현광(旅軒 張顯光)은 “우리 동방의 절의를 평론하는 자가, 곧 ‘야은 선생은 동방
의 백이(伯夷)’라 하니, 오직 백이를 아는 사람이라야 선생을 알 수 있을 것이다.[야은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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