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7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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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였다. 한편으로 이 지역 헌전은 보통 남북방향 영토를 분할하는 분봉제(分封制)의 시행으로 ‘분
으로만 개방된 구조를 보인다. 헌전의 좌우가 봉 받은 토지[封土]’의 의미가 중시되면서, 토지
막히고 앞뒤로 개방된 이유는 간명하다. 신령 신은 점차 추상적인 ‘영역의 상징’으로 정립되
에게 제사 지내는 방향성과 중심성을 분명히 어 갔다. 특히 유교 중심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중국의 종교건축에서, 는 사람 형상의 소상(塑像)이 불가의 습속이라
정전 이하의 건물들이 대체로 참배를 위한 통 하여 배척하여, 토지신에서 인귀(人鬼)의 형상적
과의 기능을 위주로 하는 건축양식도 영향을 특징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조선에서는 사라진
준 듯하다. 지모신이지만, 중국 민간 사묘에서 친근한 인
헌전을 통과하여 정전으로 들어갔다. 정전에 귀의 형상으로 살아 있는 ‘어머니 대지의 신’이
는 후토 성모의 진신(眞身)이 이 중앙에 안치되 참 반가웠다. 좌우 기둥에 쓰인 대련(對聯)의 깊
어 있고, 좌우에 화신(化身) 격인 두 낭랑신이 있 은 의미를 새겨보며 뒤편 추풍루로 향했다.
었다. 자식을 보내주는 ‘송자(送子) 낭랑’과 약을
내려주는 ‘시약(施藥) 낭랑’이다. 중앙의 후토신 后配六合之天, 至上至尊, 聖德自應崇代代.
은 후덕한 귀부인의 형상이다. 황후의 복식에 후토는 육합의 하늘과 짝지어 있으니 지극히 높
곤괘(☷) 원패(圓牌)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 고 존귀하여, 그 성덕이 응당 만세토록 숭앙받고
은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치
조선 500년 이래, ‘무형의 자연신’을 강요받은 土爲萬物之母, 資生資育, 世人所以稱娘娘.
지모신(地母神)이 답답한 방형의 사직단에 봉인 땅은 만물의 어머니가 되어, 그 바탕이 낳고 기르
되어 있다가 불현듯 해방을 맞은 느낌이었다. 는 것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낭랑[여신]이라 일컫
토지신인 사(社)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원시 는다.
모계사회의 풍요·다산과 관련된 ‘대지의 신’ 즉
지모신 신앙과 연관된다. 중국학계는 우하량 정전 뒤편의 추풍루는 황하를 마주해 우뚝
홍산유적에서 출토된 여신상을 지모신인 동시 서 있다. 벽돌로 쌓은 육축이 누각을 받치고 있
에 조상신으로 본다. 그러면서 사직 제사와 연 고 높이 32.6m, 3층으로 된 벽돌·목조구조로
관하여 사신(社神)의 성격을 가진 제사 대상이었 이루어져 있다. 전반적으로 비운루와 형태가
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지모신 신앙과 관 비슷하나 규모가 더 크다. 날아갈 듯한 지붕선
련된 ‘社’ 관념은 부계사회의 등장과 함께, 구 의 유려함, 십자형 팔작지붕의 리듬감 그리고
룡(句龍)이나 후직(后稷)과 같은 남성 신격으로 각 층의 난간과 처마의 두공 구조를 보니 마치
변모했다. 그러다 주(周)대 이후에는 제후에게 아름다운 3층 목탑처럼 느껴졌다. 추풍루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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