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대한사랑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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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을 펼쳤다. 그가 즉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원나라는 강남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지
            원군을 고려에 요청하였다. 고려 왕조도 재정

            이 피폐한 상태였지만, 거절할 수 없어 최영을

            비롯한 장군들에게 2천 명의 병력을 주어 원정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초상ⓒ경기도박물관
            에 나서도록 하였다.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

            라 불렸던 이 부대는 1354년 7월부터 약 2년                   북원의 황제 혜종은 명나라에 쫓겨 상도를
            간 원나라 땅에서 고우성(高郵城) 전투를 비롯한                   거쳐 응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고

            20여 회에 걸친 전투에 참여하였다. 반란군 진                   말았다.(1370) 기황후의 아들이며 황태자였던

            압에는 실패하였지만, 이 전쟁을 통해 고려는                     아유시리다라(소종昭宗)는 몽골로 돌아가서 원
            원나라의 취약함을 직접 확인하였다. 공민왕은                     나라의 재건을 시도하였다. 한편 요동 지역의

            원정부대의 보고를 토대로 본격적인 반원 정책                     요동행성을 다스리던 평장(平章) 유익(劉益)은 명
            을 시행하였다. 먼저 기철 등의 친원 세력을 숙                   나라에 항복하였다. 북원의 군벌 나하추는 원

            청한 후, 원나라의 간섭 기구인 정동행성을 폐                    나라의 잔존 세력을 모아 만주의 지배자가 되

            지하였다. 그리고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땅                      어 신흥 명나라에 빼앗겼던 요동을 회복하려고
            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동원, 쌍성총관부를 공                    고려에 합동작전을 요청하였다. 고려가 병력파

            격하였다. 당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과 이성                     견을 꺼리자, 나하추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

            계가 고려에 협력하여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설득하려 하였다.
            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여진족을 공격하여 여진과 나

              공민왕은 더 나아가 압록강 너머 원나라 요                    하추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더 나아가 1387년

            동의 역참(요동팔참遼東八站)을 공격하도록 하여                    20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나하추를 굴복시켰
            그 가운데 세 곳을 점령하였다. 이것이 고려 최                   다. 그리하여 몽골로 후퇴하였던 북원이 고려

            초의 요동 정벌이었다. 공민왕은 또 원나라 관                    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은 완전히
            제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연호 사용도 중단하                      사라지고 말았다. 몽골 웃치긴 왕가의 마지막

            였다.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혜종의 연호 ‘지정                    인물 요왕(遼王) 아자스리도 나하추가 항복하자

            (至正, 1341-1367)’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북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그는 항복의 대가로 명
            원(北元)’으로 표기하였다. 북원은 고려가 원나                   나라로부터 태녕위지휘사의 직책을 받고 흥안

            라를 부르는 새로운 명칭으로 고려가 만든 연                     령 동쪽에 있는 가문의 영지도 그대로 유지할
            호였던 셈이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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