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대한사랑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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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적의 난은 곧 원나라에 알려졌다. 원나라 지만, 원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여 900척의 선박
에서는 재판관인 단사관(斷事官)을 고려에 파견 을 건조하고 1만 5,000명의 병력을 지원하였
하여 사태를 조사하였다. 결국 충혜왕은 원나 다. 1274년의 제1차 일본원정은 태풍을 만나
라로 잡혀가 투옥되었다. 그런데 충혜왕에게 실패하였다. 남송이 44년간의 전쟁 끝에 멸망
적대적이었던 원나라의 실권자 바얀이 실각하 한 2년 후인 1281년에 벌어진 제2차 일본원정
자, 충혜왕은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에는 1차 원정 때보다 배로 많은 고려군이 동
한 충혜왕은 여전히 방탕한 행각을 계속하다 원되었으나, 이번에도 일본원정은 태풍으로 인
기철(奇轍)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강력한 비판 해 실패로 돌아갔다.
에 직면하였다. 기철은 당시 원나라 황제 혜종 정동행성은 이 시기에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
의 처남 즉 기황후의 오빠로, 친원파의 우두머 된 기구였는데,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준
리격인 인물이었는데, 충혜왕을 비판하면서 아 말이다. 동쪽을 정벌하는 행중서성(行中書省)이
예 고려를 원나라의 한 지방(省)으로 편입시켜 라는 뜻인데, 행중서성은 원나라가 설치한 지
달라는 청원을 하였다. 이것이 소위 ‘입성론(入 방 행정기구였다. 모두 11개로 그 가운데 요동
省論)’이다. 비록 원나라는 입성론을 받아들이지 지역에 설치된 요양행성과 더불어 정동행성은
않았지만, 충혜왕을 그대로 두지는 않았다. 파 고려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동행성은
견된 원나라 사신들은 충혜왕을 붙잡아 구타 원래는 제2차 일본원정 직전 요동행성 치소인
하고 원으로 압송하였다. 그는 티베트로 유배 요양에 설치되었다가 1281년 몽골군이 고려로
형에 처해졌는데, 유배지로 가는 도중 30세의 들어오면서 함께 옮겨왔다. 그러나 일본원정이
나이로 급사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고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원정이라는 원
려 백성들 중에는 기뻐서 만세를 부르는 자들 래의 군사적 역할은 없어지고 고려를 감시하는
도 있었다고 고려사절요 에 전한다. 기관으로 바뀌었다. 원은 충렬왕을 정동행성의
최고책임자인 정동행성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정동행성(征東行省) 이후 고려 왕은 자동으로 정동행성 책임자 역
쿠빌라이 황제는 1260년 고려를 사실상 지 할을 겸하게 되었다.
배하게 된 후, 남송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충혜왕과 그의 두 어린 아들 즉 충목
남송을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쿠빌 왕(재위 1344-1349)과 충정왕(재위 1349-1352)이 왕
라이는 남송과 교역이 빈번한 일본에 대한 원 으로 있던 시기에 고려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
정을 계획하여 고려에 병선 건조와 병력파견 다. 앞서 말한 고려를 원나라에 속한 하나의 행
을 요청하였다. 고려는 일본원정 참여를 꺼렸 성으로 만들고 고려의 왕권을 폐지하려는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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